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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11년 5월에는 ‘제비뽑기’ 방식이 이용됐다. 서울 종로구의 한 찻집에 모인 건설사 관계자 4명은 한국철도시설공단이 발주한 서해선 복선전철 제5공구(5.1㎞) 건설공사에 입찰하면서 투찰률을 94% 선에서 맞추기로 합의했다. 각 사의 투찰률을 종이에 적은 뒤 순서대로 뽑아 적힌 대로 투찰에 참여하는 방식을 썼다. 설계와 입찰 금액 점수를 합산해 낙찰업체를 결정하는 턴키공사 방식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수법이었다. 입찰 결과 투찰률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설계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기업이 선정됐다. 공사비 4650억원에 달하는 관급공사가 제비뽑기로 결정된 셈이다.
25일 취재팀의 관급공사 입찰담합 분석을 통해 드러난 제비뽑기식 짬짜미의 구태는 국책사업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됐는지 그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관급공사 입찰에서 벌어지는 짬짜미는 대기업과 중견·중소기업 등 규모에 따른 스타일 차이만 있을 뿐 전방위로 퍼져 있었다.
업계 1위 대기업에서 중소규모의 선박회사까지 수십개 업체들이 많게는 수조원, 적게는 수십억원의 공사를 따내기 위해 제비를 뽑고 뒷돈을 건넸다. 특히 대형 건설업체들은 최근 국책공사가 대부분 턴키 방식으로 발주되는 점을 악용해 ‘협상형 나눠먹기’ 담합에 주력했다.
턴키 방식이란 설계와 시공 일괄입찰 방식으로, 대형 건설업체에 유리해 건설 부패의 온상으로 지목되고 있다. 국내에서 대형 관급공사에 참여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춘 업체가 10여개로 한정된 상황에서 불필요한 경쟁을 최소화해 ‘나눠 먹자’는 의식이 팽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취재팀 분석결과, 지난 6년간 담합으로 적발된 관급공사 입찰 방식의 60% 이상이 턴키 방식이었다. 담합이 적발돼도 소송으로 과징금을 줄이면 그만큼 남는 장사라는 관행이 건설사들을 쉽게 담합의 유혹에 빠지게 한다는 지적이다. 올해부터 폐지되긴 했지만 호남고속철 사업에서 보듯, 최저가 공사 제도가 입찰담합 대상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중소업체들은 300억원 이하의 적격대상 공사에서 형평성 시비를 차단하기 위해 도입된 ‘1개사 1공구’ 입찰제도의 허점을 담합으로 파고들었다. 이들 업체는 또 지방자치단체들이 향토기업인 건설업체를 보호하기 위해 입찰 참가자격에 해당 지역 건설업체를 포함하는 조항을 활용해 대기업과 컨소시엄 형식으로 담합하기도 했다.
교묘한 신종 수법도 등장하고 있다. 2011년 서울시 구의 및 자양 취수장 이전 건설공사 입찰담합 사건에서는 이전 관급공사에서 주로 쓰인 최저가 낙찰 제도의 허점을 역이용한 수법이 포착되기도 했다.
최저가낙찰제는 300억원 이상의 공공발주 사업 입찰에서 예정 가격보다 낮은 업체 중 최저가격을 제시한 사업자를 낙찰자로 결정하는 제도다.
하지만 당시 세부심사기준을 살펴보면 기준가격보다 높은 가격은 물론이고 무리하게 낮은 가격을 제시하는 것도 ‘부적정’으로 판단했다. 그 기준으로 보면 부분공사 기준금액보다 20% 이상 낮은 경우 낙찰에서 배제될 확률이 높았다. 이에 짬짜미에 나선 업체들은 특정 공정의 입찰금액을 일부러 높게 잡아 기준금액을 올려 담합에 가담하지 않은 정상적 입찰 참여자의 투찰금액을 20% 이하로 낮아지게 해서 탈락시키는 수법을 썼다.
반면 건설사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담합 사실은 인정하지만, 4대강 사업 등 정권 차원의 사업에서는 정부가 일정 부분 담합을 묵인하기도 한다는 주장이다.
신영철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국책사업감시단장은 “담합은 가격 담합·진입장벽 담합·공동도급 담합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공정위는 입찰 담합만 문제를 삼고 있다”며 “현재 드러나고 있는 담합사건은 실제 이뤄지고 있는 담합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이천종·안용성·이현미·이동수기자 skyle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