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발생, 화재발생, 숭례문….”
출동하면서도 ‘설마’ 생각뿐이었다. 정말 국보 1호에 불이 났을까? 처음에는 남대문시장인가 했다. 그런데 정말 숭례문이었다.
신고접수 7분 만인 8시57분, 현장에 도착했다. 숭례문은 흰 연기만 내뿜었다. 이상했다. 불이 났다고 했는데, 연기만 보인다. 화재 현장에서 연기가 나는 경우는 두 가지. 초기 화재거나, 불길이 사그라질 때뿐이다. 후자이길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았다.
“빨리 잊어야겠지만,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세계일보와 만난 오용규(51) 소방경은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여전히 그때 기억이 머릿속에 남아있어서다. 현재 도봉소방서 지휘팀장인 그는 숭례문 화재 당시 중부소방서 소속으로 초기 진압을 지휘했다.
“국민께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앞으로도 미안한 마음 그대로 살아갈 겁니다. 남은 소방관 생활 동안 두 번 다시는 비슷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국민의 재산, 생명보호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세계일보와 만난 오용규(51) 소방경은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그는 “빨리 잊어야겠지만,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
오 소방경은 숭례문 화재 당시 현장 총지휘를 맡았다. 그는 소방서장과 본부장 그리고 대통령으로 지휘권이 넘어간 후에는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초기에 막지 못한 게 자기 탓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경력 18년 차 베테랑인 그도 숭례문 화재는 어쩌지 못했다.
“숭례문에 불이 날 거라고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저를 포함해 당시 출동했던 대원들이 모두 똑같았죠. 현장에 오니 회현소방서 대원들이 진압 중이었습니다. 나중에 오해가 풀렸지만, 국민들께서는 저희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오 소방경은 대책이 미비했던 점을 인정했다. 그는 “국보 1호에 불이 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없었다”며 “만약 불이 나더라도 어떻게 끌지 소홀히 했던 문제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숭례문 지붕 구조도 미리 알아야 했다”며 “국보 1호라는 상징성 등 때문에 여러 가지로 미흡했다”고 덧붙였다.
소방대를 향해 “과감하지 못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초기에 지붕을 뜯고 불길을 잡아야 했다는 게 중론이었다.
오 소방경은 “우리 장비는 (지붕을) 뚫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재청은 ‘불이 크지 않으면 조심히 하라’는 말을 했다”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묻는 대원들에게 ‘과감하게 끄라’는 지시를 내리지 못했다”고 했다. “(기왓장을) 파괴해도 좋다”는 문화재청의 전달이 온 것은 1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알고 보니 지붕 기와는 1997년에 교체됐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숭례문 기왓장도 국보에 해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초기 고민 이유죠. 사실 숭례문 전체가 국보지, 기왓장은 해당한다고 볼 수 없었죠.”
오 소방경은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 또 나온다”며 미안해했다.
출동하면서도 ‘설마’ 생각뿐이었다. 정말 국보 1호에 불이 났을까? 처음에는 남대문시장인가 했다. 그런데 정말 숭례문이었다. / 사진=세계일보 DB |
사고 후, 서울시 소방재난본부가 제출한 ‘숭례문 화재사고 종합보고’에 따르면 방화범 채모(70)씨가 누각 2층 바닥에 뿌린 시너로부터 시작된 불길이 고온의 열기둥을 형성했다. 누각 천장에 열기가 전달되자 목재 속 수분이 분해되면서 가연성 가스가 방출됐고, 불붙기 쉬운 환경이 조성됐다.
오 소방경은 ‘훈소화재’라고 했다. 불꽃 없이 연기만 발생하는 연소다. 대원들이 의아하게 생각했던 연기였다. 누각 내부 온도가 목재 발화점(450℃)을 넘어서면서 적심층 속 대팻밥과 나뭇조각 등에 붙은 불이 천장 내부로 급격히 퍼졌다. 화약고에 불이 붙은 꼴이었다.
오 소방경의 악몽은 2009년까지 이어졌다. 사고 현장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다행히 꿈에까지 나오지 않았으나, 늘 불안에 떨었다. 스트레스도 심했다. 오 소방경의 가슴을 짓눌렀던 스트레스는 2009년 노숙자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면서 조금씩 사라져 갔다.
숭례문 악몽은 2013년, 오 소방경의 꿈에서 재현됐다. 공교롭게도 그의 꿈에 숭례문이 나타난 것은 복원식(5월4일)을 일주일 정도 앞둔 시점이었다.
고향 친구들은 오 소방경에게 “그것도 똑바로 못 지켰냐”고 말했다. 물론 농담이었다. 그를 측은히 여긴 친구들만의 걱정 표현 방식이었다. 오 소방경은 “미안하다, 미안해”하며 쓴웃음만 지었다.
오 소방경은 경찰서도 갔다. 초기 지휘담당이었으니 책임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를 마주한 강력팀장은 “소방관님이 현장에서 놀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조사해야 하니 이해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아, 여기서 끝이구나.’
오 소방경은 옷 벗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방화범이 잡히면서 그의 책임을 묻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죽이고 싶을 만큼 방화범이 미웠다. 국보 1호를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숭례문 등 문화재 화재에 대비한 정책이 수립됐다. CCTV를 포함해 감시장비도 보강됐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다. 누군가 마음먹고 숭례문에 불을 지른다면, 나중에 범죄자는 잡을지라도 미리 제지할 방법이 없어서다.
지난 2009년, 숭례문 화재 1년을 맞아 문화재 화재대응 합동소방훈련이 실시된 덕수궁 중화전 / 사진=세계일보 DB |
“화재는 사전 예방이 가장 중요합니다. 일반 건물 화재는 골든타임이 5분입니다. 지나면 끌 수가 없어요. 그래서 방지에 주력해야 한다는 겁니다.”
정년을 7년 정도 남긴 오 소방경은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는 말에 “일단 소방관 평균 수명으로 따지면 살 날이 5년 좀 넘게 남았다”고 농담을 건넸다.
“미국은 소방관 대우가 좋지만 우리는 안 그렇죠. 문제는 소방관 스스로가 그렇게 느낀다는 겁니다. 소방관이라는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사람 목숨 구하는 직업이므로 자긍심을 가져야겠습니다.”
후배들에게 한마디 해달라는 말에 오 소방경은 “바다와 같이 항상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킨다는 생각을 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
오 소방경은 최근 세상을 떠난 故 신영복 교수의 ‘처음처럼’이라는 책을 언급했다.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 ‘바다는 모든 시냇물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바다입니다. 바다는 가장 큰 물입니다. 하지만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 있습니다. 바다가 그 모든 시냇물을 모을 수 있는 비결은 자기 자신을 가장 낮은 곳에 두는 데 있습니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바다와 같이 항상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킨다는 생각을 하기를 바랍니다.”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
사진=한윤종 기자 hyj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