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부천시의 번화한 동네로 상전벽해한 원미동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꺼내는 이유는 지난해부터 큰 화제를 모았던 드라마 ‘응답하라1988’(응팔)의 쌍문동 사람들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종편에서 방영됐음에도 전국민적 화제로 뜨겁게 부상해 종편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경신했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한결같은 표정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자주 웃지만 중간에 눈물을 참기도 힘들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이 같은 이야기는 얼핏 원미동 사람들을 닮았다.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에 등장하는 임씨는 시골에서 땅 팔고 올라와 서울에서 떠돌아다니다가 전세방 생활을 청산하고 겨우 연립이나 한 채 사서 원미동으로 들어온 사람이다. 이 바닥에서 안 해본 일이 없다. 얼음 장수, 채소 장수, 번데기 장수, 걸리는 대로 했다. ‘자식 새끼가 많다 보니 쓰이는 돈도 많아’ 어느새 몸으로 벌어먹는 일을 주로 하게 됐다. 뺑끼쟁이, 미장이, 보일러쟁이 뭐 손 안 댄 게 없다. 그러다 겨울 닥치면 공터에 연탄 부려놓고 연탄 배달로 먹고살았다. 굳은살이 박힌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임씨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겨울 돼봐요. 마누라나 새끼나 왼통 검댕칠이지. 한 장이라도 더 나르려니까 애새끼까지 끌고 나오게 된단 말요. 형씨, 내가 이런 사람입니다. 처자식들 얼굴에 검댕치 묻혀놓는, 그런 못난 놈이라 이 말입니다.”
이 ‘못난 놈’의 연탄값을 떼먹고 가리봉동으로 도망간 사업주에게 돈을 받아내기 위해 공치는 비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으로 가는 사연이다. 여기까지만 비교하면 응팔의 쌍문동 사람들이나 원미동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비슷한 것 같지만 30년 시차를 둔, 그것도 드라마와 문학의 차이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다. 쌍문동에는 간혹 슬픔은 살짝 내비치지만 대부분 긍정적인 상황과 인물들로만 채워져 있다. 쌍문동에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나쁜’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덕선이네, 선우네, 정팔이네 엄니들은 밥이며 반찬이며 마음까지 모두 자기 것처럼 나누는 물샐틈없는 우정을 유지하는 선하디 선한 존재들이다. 선우 정팔이 도롱뇽 택이, 이 청소년들은 모두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서로를 배려하는 ‘개그맨’들이다.
‘원미동’에는 슬프고 힘든 군상이 지배적이다. ‘한계령’에 등장하는 ‘미나박’은 옛날 동네에서 같이 살던 여자애 ‘박미화’다. 이 친구가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와 자신이 노래 부르는 나이트클럽에 와달라고 청한다. 작가인 화자는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미나박이 그 클럽을 그만둔다는 날 어둠 속에 멀찌감치 짙은 화장을 한 그네의 노래 ‘한계령’을 듣는다. 노래를 듣다가 그네는 발길을 돌린다. 미나박은 다시 전화를 걸어온다. “야, 작가선생이 밤무대 가수 신세인 옛 친구 만나려니까 체면이 안 서대? 그러지 마라. 네 보기엔 한심할지 몰라도 오늘의 미나박이 되기까지 참 숱하게도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했으니까.”
너무 멀리 와버렸다. 문학과 드라마 사이, 원미동과 쌍문동 사이는 30년 세월이 흘러도 좁혀지지 않는다. 짧은 위로 대신 사람살이의 깊숙한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거든 책을, 문학을 찾을 일이다. 힘들어도 직면해야 할 우리의 진실은 엔터테인먼트 너머에 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