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B씨는 2006년 회사가 부도나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모아둔 은퇴자금으로 작은 가게를 하나 차렸지만 파리만 날리다가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생활고에다 부부갈등마저 깊어지자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어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죽음으로까진 이어지지 않았지만 자살 시도 후유증 치료비로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면서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밤늦도록 멍하게 TV 앞에만 앉아 있기 일쑤였던 그는 어느 날 새벽 집을 나간 뒤 인근 야산의 차 안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중앙심리부검센터가 자살 원인과 유형 등을 분석하기 위해 실시한 유가족 면담을 토대로 각색한 사례들이다. 최소한 이 땅에서 A, B씨의 사례는 더 이상 남의 이야기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2014년 기준 국내 자살 사망자만 해도 1만3836명에 달한다. 매일 36분마다 1명씩, 약 40명이 스스로 생명줄을 끊어버리고 있는 셈이다. 사람답게 살기 힘든 지옥 같은 대한민국을 의미하는 ‘헬조선’의 암울한 풍경이다.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벗기 위해 ‘사회안전망’ 강화 등 서둘러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2일 통계청 등에 따르면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회원국 가운데 11년째 부동의 1위다. OECD 기준 인구 10만명당 자살자 수는 1990년만 해도 8.8명으로 일본(17.5명), 미국(13.1명)보다 적었고 OECD 평균(16.2명)에도 한참 못 미쳤다. 그러나 2003년 28.1명으로 증가해 OECD 회원국 중 1위로 올라선 뒤 선두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국내 자살률 급증의 변곡점은 경제 위기와 맥을 같이 했다. 1997년 15.6명이었던 자살자 수는 외환위기(IMF사태)가 본격화한 1998년 21.7명으로 껑충 뛰었다. 신용카드 대란이 발생한 2003년에는 28.1명으로 전년(22.7명)보다 5.4명이나 늘었다.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에도 33.8명으로 전년(29명)보다 4.8명이 증가했다.
이처럼 경제 악화나 소득불평등이 자살률 증가로 이어지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발 금융위기가 세계를 강타한 2008년과 2009년 사이 ‘복지천국’으로 불리는 스웨덴(12.2→12.9명), 노르웨이(10.6→11.9명) 등의 자살률이 증가세로 돌아선 데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해외 선진국의 자살률이 금융위기 극복 후 감소세로 전환하고 있는 것과 달리 우리나라만 유독 하락 기미가 안 보인다는 게 문제다. OECD는 지난해 11월 발간한 ‘한눈에 보는 OECD 보건 2015(OECD Health At A Glance)’ 보고서에서 “1990년 이후 회원국 전반의 자살률이 30%가량 줄고 헝가리와 핀란드는 절반 가까이 감소했지만 한국과 일본의 자살률만 증가 추세를 보였다”며 “아시아 경제위기가 지나간 뒤 자살률이 다시 감소세로 돌아선 일본과 달리 한국은 2009년 정점을 찍을 때까지 지속 증가세였으며, 특히 10대 연령층에서는 자살이 사망원인 1위”라고 지적했다.
다행히 최근 들어 한국의 자살률은 다소 낮아지긴 했지만 2013년 현재 28.5명으로 OECD 평균(12.0명)을 두 배 이상 상회한다. 자살률이 20명이 넘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같은 해 터키(2.6명)나 2012년 그리스(4.2명), 멕시코(5.0) 등과 비교하면 암담한 수준이다.
고령화 시대를 대비해야 하는 한국 입장을 특히 곤혹스럽게 하는 점은 노인 자살률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점이다. 한국의 70세 이상 노인 자살률은 116.2명으로 다른 나라의 최대 10배에 이른다. 특히 2020년부터는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 출생)가 노인인구에 본격 편입되기 때문에 지금보다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이상영 선임연구원은 “베이비붐 세대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느라 노후 준비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노인 자살률이 높게 유지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한국 자살 문제의 핵심 원인으로 취약한 사회안전망, 양극화 심화, 가정의 붕괴 등을 꼽고 있다.
한국자살예방센터 정택수 센터장은 “전쟁 이후 경제 살리기에 몰두해 ‘잘 먹고 잘 살자’는 슬로건으로 앞만 보고 달려오다가 양극화로 인해 상대적 빈곤, 박탈감, 격차가 심화된 것이 자살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며 “과거 대가족 중심 가족구조에서는 가정이 심리적 보호자 역할을 해 줬는데, 최근 들어 가정마저 무너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신대 홍선미 교수(사회복지학)는 “2014년 2월에 일어난 송파 세 모녀 사례 등을 보면 경제적 취약계층이 정서적 우울감을 가지고 있고, 고연령층은 빈곤에 더해 신체질환, 가족 소외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며 “일시적 예방대책뿐 아니라 복지, 의료가 같이 연계돼 삶의 위기를 줄여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90억원대 수준인 자살예방 관련사업 예산의 확충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자살 충동을 느낄 때 상담이 가능한 정신건강 위기상담전화(1577-0199)의 경우 평소 시·군·구 단위에서 운영되는데, 야간이나 주말·휴일에는 시·도 단위로 전환돼 긴급 대응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지금까지 두 차례 자살예방대책 5개년 계획을 수립·추진하는 한편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위한 법률’을 제정해 자살 문제에 대응하고 있다. 최근에는 자살 원인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자살사망자 121명의 유가족 151명에 대해 광범위한 심리부검을 실시하기도 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심리부검을 통해 자살 원인을 면밀하게 분석할 수 있게 됐다”며 “이를 바탕으로 이르면 이달 중순 정신건강증진대책과 함께 제3차 자살예방대책 5개년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유태영·남혜정 기자 anarchy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