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여행] 근대문화 살아 숨 쉬는 ‘광주의 몽마르트르’

광주 첫 서양 근대문물 받아들인 통로
‘한옥+서양’ 독특한 건축물 어우러져
예술가 레지던스·영화 촬영지 등 각광
정율성·김현승… 예술인과도 인연 깊어
  
미국 선교사가 1920년 네덜란드 양식으로 지은 우월순 선교사 사택이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어 겨울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이 건축물은 광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축물이다.
지난해 개관한 광주시 동구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광주천을 건너 10여분을 걷다 보면 남구 양림동 근대역사문화마을이 나온다.

양림동은 다른 지역보다 조금 높은 언덕배기에 위치해 있다. 이 언덕배기에 오르면 광주의 상징 무등산이 손에 잡힐 정도로 가깝게 느껴진다. 양림동은 100년 전 광주 최초로 서양 근대문물을 받아들인 통로다. 19세기와 20세기의 한옥과 서양식 근대건축물이 한 동네에 어우러져 있다.

시민들은 이 언덕배기에 자리한 양림동을 ‘광주의 몽마르트르’라 부른다. 예술적 상상력이 만개한 예술가의 아지트인 파리 몽마르트르를 빗대 나온 말이다. 순교자의 언덕인 몽마르트르에서 파리코뮌이 시작된 것처럼 양림동도 3·1운동과 5·18민주화운동 등 시대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1920∼30년대 미국 선교사들이 양림산 일대에 건축한 커티스 메모리얼 홀.
◆근대 문물 통로… 예향·의향의 뿌리

11일 찾은 양림동은 골목마다 문화감성이 넘쳐났다. 해발 108m의 양림산 언덕에는 유럽풍의 고딕건축물 9동이 호랑가시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양림산은 1904년 미국의 선교사들이 전라지역 선교의 중심지로 삼은 곳이다. 미국 선교사들은 당시 양림산 부근에 밀집해 있는 부유층 인사들과의 교류를 위해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우월순 선교사 사택.
유럽풍의 이 건축물은 100년이 지났지만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돼 있다. 미국 선교사들이 서양과 한옥 양식을 조금씩 섞어서 지은 독특한 건축물이다. 역사적 의미와 건축적 가치가 높은 9동의 근대건축물은 문화재청의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국내에서 유럽풍의 건축물이 단지로 보존돼 있는 곳은 양림산이 유일하다. 선교사들이 떠난 이 건물은 예술가들이 머물면서 창작을 하는 레지던스로 활용되고 있다.

양림산에 오르는 골목길도 1920∼30년대의 모습이 남아 있다. 최근에는 예술가들이 1920∼30년대의 거리 풍경을 재연했다. 시인 김현승의 호를 딴 다형다방 언덕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200m 정도의 문화거리는 발칙한 상상력을 동원해 양림의 역사와 인물을 채우고 있다. 100년 전 시간이 멈춰 있는 곳 양림동, 마치 구한말 어느 한 시점에 와 있는 분위기다.

양림동이 새로운 문화적 감성과 아이템들로 젊은층을 끌어들이는 예술동네로 변신하고 있다. 실험적 문화프로젝트와 예술거리, 주민 주도의 축제와 아트마켓, 주민들 놀이터인 정크아트 골목 등이 관광객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오웬 기념각.
양림동은 조선 후기 ‘햇빛에 버드나무가 흔들리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광주 정씨의 본관이다. 근대 들어 미국 선교사들이 선교와 의료활동을 폈던 지역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서양문물의 유입이 빨랐던 곳으로 한때 ‘서양촌’으로 불리기도 했다. 광주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가 시작된 곳이다. 당시 양림동에 살던 광주의 부호들은 외국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근대문화에 일찍 눈을 떴다.

광주의 근대발전소 역할을 했다. 또 근대 신문화를 도입하는 관문이 됐다. 광주의 근대문화 형성에 양림동의 문화활동이 큰 역할을 미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전통과 근대가 어우러진 양림동은 살아 있는 근대역사문화박물관으로 손색이 없다.

광주시는 2010년 개화기 근대건축물과 도심 생태 보전을 위해 양림동 역사문화마을 관광자원화사업을 추진했다. 시는 2013년까지 307억원을 들여 양림산과 사직공원 일대 20만㎡에 보행네트워크, 역사문화공간, 관광편의시설 등을 조성했다.

근대문물을 먼저 받아들인 양림동은 일제강점기 때 3·1만세 운동을 주도하는 등 예향에서 의향의 정신을 발휘했다. 선교사들이 세운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1919년 광주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일제의 유혈진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만세운동은 계속됐다. 학생 23명이 구속됐다. 이런 의향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등 시대정신으로 이어졌다.

김현승 시인을 추억하는 ‘다형다방’으로 1920∼30년대의 모습으로 단장했다. 방문객이 직접 차를 타 마시는 무인 카페다.
◆세계적 예술가 배출… 상상놀이터 변신

1920∼30년대 양림동에서 자란 소년들은 세계적인 예술가로 성장했다. 전통과 근대가 어우러진 양림의 문화가 자양분 역할을 한 셈이다. 중국을 울린 혁명음악가 정율성과 시인 김현승이 양림동에서 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양림동 79번지는 중국 3대 현대음악가로 추앙받고 있는 정율성의 출생지다. 정율성은 중국의 아리랑으로 불리는 옌안송을 비롯해 가곡·합창·동요·영화음악 등 모두 360곡을 남겼다. 그가 작곡한 팔로군행진곡은 중국인민해방군가가 됐다. 정율성은 2009년 건국 60주년 때 신중국 창건 100명 영웅에 뽑혔다.

정율성 음악의 원천은 양림동에서 보낸 소년기와 청년기가 큰 영향을 미쳤다. 정율성의 발자취는 양림동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정율성로’에는 정율성이 어릴 때 살았던 가옥과 함께 음악세계와 생애를 만날 수 있는 거리전시관이 조성돼 있다. 중국 공산당과 북한에서 활동해 정율성에게 붙은 빨간딱지는 2005년 광주시가 정율성 국제음악제를 열면서 ‘금기의 벽’이 깨졌다. 지금은 중국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됐다.

김현승 시의 무대는 그가 유년시절을 보낸 양림동이다. 김현승 시에 자주 등장하는 언덕, 나무, 까마귀, 이발소, 책방 등은 양림의 흔적들이다. 평양 태생인 김현승은 7세 때 목사인 아버지가 광주 양림교회에 부임하면서 광주와 인연을 맺었다. 광복 후에는 광주로 내려와 조선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광주문학의 토대를 쌓고 인재들을 배출했다.

양림언덕에 세워진 김현승 시인의 시비.
김현승의 발자취가 양림동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가 살았던 가옥과 다니던 교회, 골목길, 무등산을 바라보던 언덕은 최근 기념공간으로 꾸며졌다. 김현승이 커피를 마시며 산책하던 곳은 그의 호를 딴 ‘다형다방’이라는 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근대 건축물이 많은 양림동은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각시탈을 비롯해 ‘여고괴담’, ‘구미호외전’, ‘위험한 상견례’ 등이 서양식 건축물을 배경으로 촬영됐다.

광주=한현묵 기자 hanshim@segye.com

<세계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