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에서 만들어졌으나 신라 지역에서 발견된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 소형 금동불은 이동이 쉬워 고대 사회의 문화 교류 현상을 잘 보여준다. |
7세기 무렵, 고구려에서는 도교의 영향으로 불교가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내부에서 밀리기 시작한 고구려 불교는 외부에서 활로를 찾았고 백제, 신라는 물론 일본으로 진출했다. ‘일본서기’를 간행한 지식인들이 고구려 문화를 “백제, 신라보다 한 단계 질이 높다.… 중국 당문화에 필적한다”고 평가한 것은 흥미롭다.
623년 조성된 호류지 금당의 석가삼존상에 고구려의 흔적이 뚜렷하다. 고대 일본 아스카 시대 조각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불상의 광배(光背·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화해 불상의 머리 혹은 몸 뒤에 배치한 장식)는 머리 부분에 연꽃 무늬를 배치한 점, 꼭대기 부분에 연꽃 위에 안치된 보주를 새긴 점, 7개의 화불(化佛·갖가지 형상으로 변화한 부처)를 두었다는 점 등에서 삼국시대 일광삼존불(하나의 광배를 배경으로 3기의 불·보살상을 배치한 형식)과 기본적으로 형식이 같다. 저자는 “특히 광배에 비천(飛天·하늘을 날아다니는 선인)을 달았던 것으로 보이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이런 형식은 고구려불로 추정되는 갑인년명 금동광배의 형식을 이어받아 단순화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앉은 자세나 2단의 옷주름이 U자형으로 반복된 불상의 옷주름은 “고구려나 백제의 것이 융합되고 정제된다면 이런 도식적인 모양으로 형성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저자는 “고구려의 불교 조각은 일본으로 옮겨져 아스카 양식의 성립에 큰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일본의 호류지 헌납보물 143호 금동삼존불. 무표정한 얼굴에 평면성이 특징인 일본 고대 불상과 달리 온화한 표정과 입체적인 조형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백제에서 만들어져 일본으로 건너간 불상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일본이 583년 불교를 공인할 즈음 확립된 ‘도리양식’의 소형 금동불은 대체로 얼굴이 무표정하고, 장방형의 틀에 끼워맞춘 듯 평면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특징이다. 하지만 ‘호류지 헌납보물 143호 금동삼존불’은 온화한 표정에 입체적인 조형성 등이 특징이다. 이런 차이는 이 불상이 일본 것과는 다른 조건과 환경에서 만들어졌지 않겠냐는 추측을 낳는다. 저자는 “백제에서 주조되어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이라고 밝혔다.
밝고 중후한 도금, 전체 형상을 만든 뒤에 끌로 눈썹선을 새긴 점, 가운데 불상의 발을 치맛자락 내부에서 성형한 점 등이 백제 금동불과의 관련성을 짐작하게 한다. 머리 부분의 광배 중심부에 광선문을 새기고 인동당초의 줄기 무늬 위에 화불을 배치한 수법은 백제 조각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또 세 갈래로 나뉜 광배의 불꽃 무늬, 그 아랫 부분에 고사리 모양의 돌기를 중첩해 표현한 것은 백제의 정형화된 양식이다. 저자는 “원래 소장처인 호류지에 일본의 초기 조각을 주도했던 대형 금동제 불상이 봉안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호류지 헌납보물 143호 금동삼존불이 동아시아 조각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웅변한다”고 설명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