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미술의 부흥이 그랬다. 런던 트래펄가 광장과 버킹엄 궁전을 잇는 큰길가에는 영국 실험예술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미술학회가 자리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아물던 시기에 동시대 미술가들과 저술가, 건축가, 과학자 등 다양한 지식인들이 모여 만든 모임이다. 당시 미적 담론을 주도했던 보수적인 로열 아카데미의 대안적 성격이 강했다. 전시공간까지 마련해 전위적인 현대미술 프로그램들을 선보였다. 대중에게 처음으로 팝아트(Pop Art), 옵아트(Op Art) 등을 선보이며 1950년대와 1960년대 영국 전위미술을 이끌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엔 세계 전위미술의 한 흐름을 형성했다. 영국 미술의 화려한 부활을 알렸던 대미언 허스트 등 1990년대 영국 젊은 작가들의 부상은 현대미술학회의 전위적 토양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방가르드(Avant-garde·전위)는 군대에서 맨 앞에 서는 선발대를 일컫는 말이다. 예술에서도 전위가 있어야 새로운 교두보도 마련하고 당대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
하이브랜드는 그냥 쉽게 디자인해서 로고만 달아 비싸게 파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내고 그 길을 가장 먼저 걸어가며 나름의 철학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시간들이 역사가 되고 브랜드가 됐다. 샤넬, 프라다, 발렌시아가, 크리스티안 디오르 등이 그 예다.
새로운 역사가 되어가는 브랜드들도 있다. 일본의 콤데가르송과 요지야마모토 등이 대표적 사례다. 창립자들이 여전히 생존해 디자인을 지휘하고 있다. 브랜드의 철학과 방향성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있을 정도다.
한국 패션계와 대조되는 상황이다. 고작 망해가는 외국 브랜드를 사 와 연예인을 동원해 홍보하는 수준이다. 이름만 사 와서는 그 역사와 철학을 계승할 수는 없는 것이다.
철학보다는 당장의 돈을 좇다 보니 브랜드 정체성은 사리지고 카피만 난무하는 패션시장을 만들어 버렸다. 작은 브랜드를 시작하는 디자이너는 물론 대기업 디자이너들도 매 한가지다. 디자이너들이 명품점을 돌아다니며 디자인 헌팅을 하는 것이 다반사가 됐다. 짝퉁 패션만 헐값에 거래되는 패션시장에서 전위적 생각은 설 자리가 없다. 누구든 먼저 보고 빨리 카피하는 것이 살길이 되고 있다. 패션 브랜드는 전자제품 등 공산품 브랜드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패션을 산다는 것은 브랜드의 역사와 이미지, 철학을 입는 것이다.
일본 패션이 요즘 급부상 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으며 마니아층을 두루 가진 브랜드들이 많다. 콤데가르송, 요지야마모토, 이세이미야케 외에도 최근 새로 글로벌하게 사랑받고 있는 언더커버, 사카이 등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도쿄 컬렉션을 거쳐 세계로 뻗어나가는 브랜드들도 많다. 일본만의 색깔을 지닌 신진 브랜드들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세계로 뻗어나가지 않더라도 일본 내 개성을 중시하는 취향적 소비가 인큐베이터가 돼 주고 있다. 특정 상표의 오리털 점퍼가 국민교복이 되는 한국적 상황과 비교된다.
정직한 패션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미래를 내다보며 그길을 걸어가 주는 것이다. 그 전위가 우리의 패션을 풍성하게 해준다. 레이카와 구보가 만든 콤데가르송은 브랜드를 시작할 당시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전위를 추구했다. 파리의 첫 컬렉션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충격을 주었다. 몸매를 드러내는 서양식 패션을 해체했던 것이다. 콤데가르송은 요즘도 12개 라인 중 하나를 전위적 라인으로 꾸려가고 있을 정도다. 패션 아방가르드의 어머니라 하면 단연코 레이카와 구보를 꼽는 이유다. 한국 패션도 미술도 전위가 필요한 시대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