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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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문소리 “내 가슴을 뛰게 한 연극… 도시락 먹으며 연습”

6년 만에 한·불 합작 연극무대 서는 배우 문소리
“연극은 어느 남자보다 내 가슴을 뛰게 한 대상이에요. 지금까지는. 하하”

배우 문소리(42)가 호탕하게 웃는다. 중학교 3학년 시절, 연극을 처음 만난 순간을 말하던 중이다. 모범생이던 그는 최민식이 출연한 연극 ‘에쿠우스’를 친구와 봤다. 충격에 심장이 터질 듯했다. 잠이 안 왔다.

“자리에 누우니 깜깜한 천장이 무대로 변했어요. 몇날 며칠 다시 공연이 시작됐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대사들을 막 썼어요. 대본이 술술 나와요. 그걸로 감상문을 써 중학교 교지에 실었어요.”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에서 만난 배우 문소리는 26살 ‘박하사탕’ 데뷔시절로 시계를 돌려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인가 묻자 “저는 이창동 감독님을 만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산고의 고통을 겪으며 문소리를 낳은, 좋은 선생님이자 친구이자 멘토”라고 말했다.
하상윤 기자
“어떤 남자를 만나도, 연극을 처음 봤을 때처럼 가슴 뛴 적이 없다”는 문소리가 6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다. 내달 4∼27일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빛의 제국’에 출연한다. 김영하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국립극단과 프랑스가 공동제작한 작품으로, 5월에는 프랑스 무대에도 오른다. 연출은 프랑스인 아르튀르 노지시엘이 맡았다. ‘빛의 제국’은 20년간 서울에서 산 남파 간첩 김기영이 갑작스런 귀환 명령을 받고 삶을 정리하는 하루를 다룬다. 문소리는 김기영의 정체를 모르는 아내 장마리를 연기한다.

“간첩인 김기영은 우리와 동떨어진 인물이에요. 분단 상황 역시 많은 이들이 평소 실감하지 못하죠. 마리는 우리와 같은 입장이에요. 하지만 남편이 간첩임을 안 순간 ‘남편이 내가 알던 김기영이 아니면 나는 장마리가 맞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거예요. 관객도 한 번 제 캐릭터와 손잡고 생각해봤으면 해요.”

노지시엘 연출은 배우들 개인의 경험을 연극 대사에 섞었다. 허구와 현실을 오간다. 다소 낯선 시도다. 문소리는 “흥미롭게 잘 전달하기 위해 다른 방식으로 연출하는데 굉장히 설득력 있다”며 “나도 모르게 남과 똑같이 표현해온 걸 되돌아보게 만든다”고 밝혔다.

“노지시엘 연출은 확신을 줘요. ‘연극이 이 세상에 좋은 일이구나’ 하고. 정치, 기업, 학교 모두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듯 보이지만 고통을 주는 일이 많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연극이 필요하구나 싶어요.”

그는 “이 연출가는 배우들이 연기하면서 기억 속 가족을 떠올리면, 가족의 삶과 영혼이 무대에 함께 하는 거라 여긴다”며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 많은 것들로 무대를 가득 채우고 싶어한다”고 전했다. 동양적 사고 같다고 하자 “실제로 한식도 굉장히 잘 드신다”며 얼굴을 활짝 폈다.

이들은 연습실에 도시락을 가져와 나눠먹는다. 문소리 역시 전이며 김치, 유자청 가지졸임까지 바리바리 싸온다. 본인 요리도 있으나 대부분 어머니 솜씨다. 프랑스인 음향 디자이너는 순대국에 김치 넣고 밥 말아먹을 정도로 한식에 빠졌다.

“연출가가 맛만 봐도 우리 집 반찬인지 알아요. 엄마한테 ‘연출이 우리 집 반찬 맛있대’ 하니까, 묵 쑤고 나물 무치고 난리 났어요. 아침부터 전 부치면서 ‘프랑스에서 오셨다는데’ 이래요. 같이 밥 먹는 게 참 좋아요.”

문소리는 “연극하면서 좋은 사람들과 지내는 경험이 부러웠다”며 “무대에 오를 때면 인간적으로도, 연기 기술 면에서도 굉장히 치유받는다”고 말했다. 

그의 이력 중 연극은 네 편이다. 90년대 중반 그는 성균관대 교육학과를 휴학하고 극단 ‘한강’ 수습단원을 했다. 봉투에 우표 붙이는 허드렛일이 그의 몫이었다. 이때 극단에서 악기 연주자를 찾았다. 연극판에선 드물게도 그는 바이올린을 켤 줄 알았다. 덕분에 첫 연극 ‘교실이데아’(1996)에 섰다.

극단 시절 그는 에너지가 어마어마한 선배들을 보며 ‘저런 에너지를 타고 나야 배우 하나봐, 난 타고난 사람이 아닌가봐’ 했다. 이후 이창동 감독과 만나 ‘박하사탕’(2000), ‘오아시스’(2002)에 나오며 영화계에 먼저 터를 잡았다. 스크린에서 연기력을 칭송받은 배우가 무대에 섰을 때 실력을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은 없는지 궁금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에이, 뭘 증명해요. 주어진 데서 재밌게 최선을 다할 수 있으면 그걸로 좋은 것 같아요. 그냥 자연스럽게 살아야죠. 연극은 할 땐 모르는데 지나고 보면 무대에서 놓친 것들이 가슴에 남아 오히려 뒤에 힘들었어요. ‘과오를 반복하지 말아야지’ 하는데, 무대에 서는 당시에는 굉장히 즐거워요.”

송은아 기자 sea@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