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문소리(42)가 호탕하게 웃는다. 중학교 3학년 시절, 연극을 처음 만난 순간을 말하던 중이다. 모범생이던 그는 최민식이 출연한 연극 ‘에쿠우스’를 친구와 봤다. 충격에 심장이 터질 듯했다. 잠이 안 왔다.
“자리에 누우니 깜깜한 천장이 무대로 변했어요. 몇날 며칠 다시 공연이 시작됐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대사들을 막 썼어요. 대본이 술술 나와요. 그걸로 감상문을 써 중학교 교지에 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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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국립극단에서 만난 배우 문소리는 26살 ‘박하사탕’ 데뷔시절로 시계를 돌려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인가 묻자 “저는 이창동 감독님을 만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산고의 고통을 겪으며 문소리를 낳은, 좋은 선생님이자 친구이자 멘토”라고 말했다. 하상윤 기자 |

“간첩인 김기영은 우리와 동떨어진 인물이에요. 분단 상황 역시 많은 이들이 평소 실감하지 못하죠. 마리는 우리와 같은 입장이에요. 하지만 남편이 간첩임을 안 순간 ‘남편이 내가 알던 김기영이 아니면 나는 장마리가 맞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거예요. 관객도 한 번 제 캐릭터와 손잡고 생각해봤으면 해요.”
노지시엘 연출은 배우들 개인의 경험을 연극 대사에 섞었다. 허구와 현실을 오간다. 다소 낯선 시도다. 문소리는 “흥미롭게 잘 전달하기 위해 다른 방식으로 연출하는데 굉장히 설득력 있다”며 “나도 모르게 남과 똑같이 표현해온 걸 되돌아보게 만든다”고 밝혔다.
“노지시엘 연출은 확신을 줘요. ‘연극이 이 세상에 좋은 일이구나’ 하고. 정치, 기업, 학교 모두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듯 보이지만 고통을 주는 일이 많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연극이 필요하구나 싶어요.”

그는 “이 연출가는 배우들이 연기하면서 기억 속 가족을 떠올리면, 가족의 삶과 영혼이 무대에 함께 하는 거라 여긴다”며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 많은 것들로 무대를 가득 채우고 싶어한다”고 전했다. 동양적 사고 같다고 하자 “실제로 한식도 굉장히 잘 드신다”며 얼굴을 활짝 폈다.
이들은 연습실에 도시락을 가져와 나눠먹는다. 문소리 역시 전이며 김치, 유자청 가지졸임까지 바리바리 싸온다. 본인 요리도 있으나 대부분 어머니 솜씨다. 프랑스인 음향 디자이너는 순대국에 김치 넣고 밥 말아먹을 정도로 한식에 빠졌다.
“연출가가 맛만 봐도 우리 집 반찬인지 알아요. 엄마한테 ‘연출이 우리 집 반찬 맛있대’ 하니까, 묵 쑤고 나물 무치고 난리 났어요. 아침부터 전 부치면서 ‘프랑스에서 오셨다는데’ 이래요. 같이 밥 먹는 게 참 좋아요.”
문소리는 “연극하면서 좋은 사람들과 지내는 경험이 부러웠다”며 “무대에 오를 때면 인간적으로도, 연기 기술 면에서도 굉장히 치유받는다”고 말했다.

극단 시절 그는 에너지가 어마어마한 선배들을 보며 ‘저런 에너지를 타고 나야 배우 하나봐, 난 타고난 사람이 아닌가봐’ 했다. 이후 이창동 감독과 만나 ‘박하사탕’(2000), ‘오아시스’(2002)에 나오며 영화계에 먼저 터를 잡았다. 스크린에서 연기력을 칭송받은 배우가 무대에 섰을 때 실력을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은 없는지 궁금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에이, 뭘 증명해요. 주어진 데서 재밌게 최선을 다할 수 있으면 그걸로 좋은 것 같아요. 그냥 자연스럽게 살아야죠. 연극은 할 땐 모르는데 지나고 보면 무대에서 놓친 것들이 가슴에 남아 오히려 뒤에 힘들었어요. ‘과오를 반복하지 말아야지’ 하는데, 무대에 서는 당시에는 굉장히 즐거워요.”
송은아 기자 sea@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