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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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가정붕괴 등 사회개발 이슈… 한국 충분히 다룰 자격 있다”

발터 리헴 전 캐나다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
발터 리헴 전 캐나다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는 1시간30분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 빈에 제3유엔사무국을 유치한 경험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제3유엔사무국 유치 과정과 전략을 설명하고, 한반도 내 제5유엔사무국 유치 움직임과 관련한 조언도 했다. 오스트리아 빈 유엔사무국(UNOV)은 1945년 미국 뉴욕 유엔본부, 1946년 스위스 제네바 사무국(UNOG)에 이어 1980년 유엔의 세 번째 사무국으로 설치됐다. 다음은 일문일답.


―제3유엔사무국 유치 과정을 소개해 달라.


“(빈에는) 1956년부터 각종 유엔 기구가 설립됐다. 당시 (새로 설립되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본부 위치를 놓고 미국과 소련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 미국은 소련에, 소련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국가에 IAEA가 설치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다 미국 측이 IAEA를 빈에 세우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제3유엔사무국 유치에 빈의 어떤 점이 고려된 건지.

“냉전시대 오스트리아는 어떤 군사협약(동맹)에도 참여하지 않고 독립적 상황을 유지했다. 중립을 유지하고, 국제사회를 위해 행동하는 것을 국가 정체성으로 삼았다. 1945∼90년 약 530만명의 피란민을 동유럽에서 받아들였다. 오스트리아는 국제사회의 공동선을 보호하고 실현할 때 자국에도 이익이 된다고 보고 있다.”

―아시아에 유엔 사무국이 없는 이유는 뭔가.

“유엔 사무국이 4개 지역(뉴욕, 제네바, 빈, 나이로비)에 위치한 이유는 단순하다. 뉴욕 사무국 운영 비용이 많이 들어 나이로비 등으로 일부를 옮기면 어떨까 해서 그렇게 됐다. 그렇다고 총회가 나이로비에서 열리는 것도 아니고 예산 편성도 20%로 동일하다. 한국이 유엔이란 깃발만 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한국은 의제를 연구하고, 이런 의제를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엔 사무국 유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권이나 지속가능한 발전, 바이오, 내전 등 (국제사회가) 집중할 수 있는 정체성을 갖고 시작해야 한다. 오스트리아는 단순히 사무국 유치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 의제를 무엇으로 할지, 어떤 것에 집중할지 등 정책적인 측면을 먼저 생각했다. 제5유엔사무국도 관련 기구들이 먼저 (한반도에) 설치되고, 이것이 기존 유엔 기구 등과 서로 교류할 때 (유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 인권연구소가 있다면 연구소가 아시아 인권단체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이후 유엔 인권기구가 들어와 시너지 효과를 내는 식이다.”

―의제 선정 과정에서 유의할 점은.

“다른 지역의 유엔 사무국에서 잘 진행되고 있는 의제를 재선정하는 것은 좋지 않다. 다른 사무국에 있는 분야를 가져온다면 그 나라 국민이 화를 낼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스위스 제네바 사무국에서 자리 잡은 기관을 가져오지 않고 스위스와 협력하고 경험과 노하우를 공유했다. 유엔 사무국 설립 과정에서는 경쟁보다 협력이 중요하다.” 

발터 리헴 전 캐나다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가 지난 14일 서울 송파구 롯데호텔월드에서 열린 국제지도자콘퍼런스(ILC) 제4세션에서 주제발표를 통해 국제 문제 해결을 위한 지역사회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제원 기자
―한국에 적절한 의제로는 뭐가 있을까.


“21세기의 핵심 현안이면서도 다른 유엔 기구에서 다루지 않은 분야가 바로 사회개발이다. 하지만 아직도 국가·정치·문화·관습적 차이 때문에 사회개발은 크게 다뤄지지 않고 있다. 일부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문제들은 유럽 등 다른 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국제적 차원에서 함께 다뤄야 할 문제라고 본다.”

―한국이 내세울 의제로 사회개발 분야가 적합하다는 건가.

“한국은 사회개발 측면에서 자격이 있다. 세계인권도시포럼이 해마다 광주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이 이 포럼을 국제사회에 내세우고 발전시킨다면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본다.”

―사회개발 분야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나.

“학회와 시민사회의 긴밀한 파트너십이 수반돼야 한다. 연구소 및 다양한 기관과의 교류·협력은 탄탄한 재정적 뒷받침을 통해 수행돼야 한다. 한 나라가 의제 프로그램을 수행할 때는 정부와 정부 사이에만 협력이 일어나지 않는다. 전문가와의 협력과 그들에 대한 지원 등이 필요한 이유다. 한국이 자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위해 이런 일을 하고 싶다고 강조하고, 실제 국익을 초월해 지구촌의 공동선을 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제5유엔사무국을 유치하는 일을 국제사회가 지지해줄 것이다.”

―한반도에 제5유엔사무국이 설치되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

“지역 긴장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통일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한반도 긴장 상황을 완화하는 기본 요소는 평화다. 제5유엔사무국의 한반도 설치가 유엔의 대북 억제 지지를 부각하는 데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 유엔 사무국의 깃발을 한국에 꽂는 일을 한반도 평화를 위한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유엔 사무국은 성취된 평화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평화가 전제되어야 유엔이 한반도에 올 수 있다.”

―제5유엔사무국이 한반도에 설치된다면 어떤 곳이 적합하다고 보나.

“접근성이 좋아야 한다. 공항과 가까워 사람들이 저녁에도 회의를 하러 쉽게 오갈 수 있어야 한다. 또 각국 대사관, 한국 내 기관들과 가까워야 한다. 유엔은 아프리카, 남미 등 다양한 대사관과 함께 일하고, 여러 기관들과 협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엔 사무국 운영비용은 어떻게 마련하는 게 좋은지.

“오스트리아는 유엔 사무국 등 국제기구를 유치해 얻게 되는 재정적 이익을 분석했다. 약 6억∼8억유로(현재 환율 기준 약 8100억~1조원)의 이익을 볼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빈에 유엔 사무국 건물을 재건축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약 10억유로(약 1조3500억원)나 되는 재정을 국제사회에 요청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해결했다. 각국에 세워진 유엔 사무국에 필요한 재원은 그 (사무국이 위치한) 국가가 충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염유섭 기자 yuseob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