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는 삼성, 패자는 엘리엇이었다. 삼성물산 지분 7.12%를 매집했던 엘리엇은 삼성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잇달아 패소했고 결국 삼성물산 지분을 거의 팔고 철수했다. 합병 비율의 문제점을 물고 삼성에 맞섰다가 ‘대박’은커녕 무자비하게 이익을 챙기는 벌처펀드로서의 ‘세계적 명성’에 금이 가는 굴욕만 당한 채 퇴장한 것이다.
제일모직 주주총회에서 삼성물산과의 합병을 승인한 지난해 7월 서울 소공동 삼성생명빌딩 컨퍼런스룸에서 제일모직 주주총회를 마친 주주들이 빠져나오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앞서 증선위 자문기구인 자본시장조사심의위원회는 엘리엇의 ‘5%룰’ 위반혐의를 검찰에 통보키로 한 원안을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시켰다. 증선위도 같은 결론을 내릴 것이 확실시된다. 금융당국은 증선위의 결정이 나는 대로 검찰에 엘리엇의 혐의 내용을 통보하고 조사 자료 일체를 넘길 계획이다.
이번 조사를 맡은 금융감독원 특별조사팀은 엘리엇이 작년 삼성물산 지분을 매집하는 과정에서 파생금융 상품인 총수익스와프(TRS)를 악용해 몰래 지분을 늘린 것이 ‘5% 룰’에 위배되는 것으로 판단했다.
엘리엇은 작년 6월4일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다고 공시하면서 시장에 전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삼성그룹의 지배 구조 재편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반대를 주장하며 주총에서 표대결을 벌였다. 당시 엘리엇은 작년 6월2일까지 삼성물산 주식 4.95%를 보유하고 있다가 이튿날 보유 지분 2.17%를 추가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당국은 엘리엇이 TRS 계약을 통해 실질적으로 지배한 지분까지 더하면 6월4일이 아닌 5월 말쯤 이미 대량 보유 공시를 했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재무적 투자 차원에서 TRS를 활용하는 것은 투자자의 재량이지만 적대적 인수합병이나 공격적 경영 참여를 염두에 두고 TRS 계약을 동원해 실질적 지분을 늘리는 것은 공시 제도 취지에 정면으로 반하는 행위라는 판단이다. 엘리엇은 TRS 계약을 통해 메릴린치, 시티 등 외국계 증권사들이 삼성물산 주식을 사들이게 하고 나서 대량 보유 공시 시점에 계약을 해지하고 이를 돌려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금융위 관계자는 “5% 이상 지분보유 사실을 공시하도록 한 공시 규정은 적대적 인수합병이나 경영 간섭으로부터 회사가 방어권을 행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며 “엘리엇의 행위가 허용되면 일반 투자자들도 적절한 투자 기회를 잃게 된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편법 TRS 활용이 적발돼 제재 대상이 된 것은 처음이다.
그러나 이미 철수한 엘리엇에 큰 타격이 될 것 같지는 않다. 합병반대 진영에 있었던 금융권 인사는 23일 “혐의가 입증된다고 해도 벌금이 부과되는 정도일 것”이라며 “그렇게 정리하는 수순일 것”이라고 말했다.
류순열 선임기자 ryoos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