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로군정서의 길’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한 달여간의 대이동이었지요.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그 길을 밟아보면 어떨까요. 일본 정규군을 대파한 대장거의 현장을 걷는다면 얼마나 영광된 일이겠습니까.”
10여년 전부터 중국 내 항일유적을 답사해 ‘두만강 아리랑’을 발간한 최범산 작가는 “중국에 있는 항일유적에 대한 발굴은 물론 보존·정비작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제원 기자 |
“답사 초기에 요령성 유하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 터를 갔었어요. 항일무장투쟁사의 처음이자 끝이고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죠. 유적을 알리는 팻말이 없고 주민들도 모르더라고요. 한국의 관련 단체에 물어봤더니 지금은 옥수수밭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중국 탓만 하고 있었던 거죠.”
2004년쯤이니 10년도 지난 이야기다. 지금이야 정비가 된 곳이 많고, 국내에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게 많다.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광복군 사령부 유적이라고 했다. 1920년대 초 무장투쟁의 기치를 올린 곳이다. 일제 주재소 습격, 친일파 습격 등 국내 진격작전을 80회 가까이 수행했다. 지금의 요령성 관전현에 자리 잡고 있는데 발굴이나 보존 등의 조치가 전혀 없다고 한다.
관심이 높다 한들 중국 땅에 있는 유적을 우리가 얼마나 정비하고 보호할 수 있을까. 최 작가는 맞는 말이라면서도 관심,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최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 정권은 ‘항일’을 정통성의 근간으로 삼는다. 마오쩌둥이 중국을 장악한 힘이 항일투쟁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전역의 항일유적은 ‘애국주의 교육기지’라고 부르며 학생들을 순례시킨다고 한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과 연계되었던 한국의 동북인민혁명군, 동북항일연군은 대대적인 홍보의 대상이 된다. 중국인들이 나서 우리 항일유적을 정비하고 보존한 사례도 있다. 다만 동북3성의 항일유적은 동북공정, 소수민족 정책, 북한과의 관계 고려 등을 고려해 소극적인 면이 없지 않다.
이제 한 세기 전의 일이 된 항일투쟁의 유적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당시의 자취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는 거의 사라졌다. 최 작가는 그나마 부족한 자료를 샅샅이 뒤지고, 해당 지역에서 오래 산 노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유적을 찾아간다. 쉽지 않은 일이다.
2011년에 지안시 깊은 산골짜기에 자리 잡은 1925년 3월의 참의부 고마령전투 유적을 찾는 데는 3년이 걸렸다. 당시 여든이 넘은 한족 노인의 증언이 있어서 가능했다. 좋아서 하는 일이기는 하다. 사명감이 그를 이끌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일에 대한 냉소에 힘들 때가 많다. 두만강 아리랑 서문에 최 작가는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지인들의 무관심과 주변인들의 냉소, 비웃음”이라고 고백했다. 유적을 찾아내 세상에 알리는 일이 우리 사회의 분열을 조장한다는 비난까지 듣는다.
“친일의 역사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친일파의 후손들은 제대로 사죄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일제강점기를 정당화하는 사람까지 있잖아요. 분란을 일으키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역사적 사실이 잊혀지는 걸 막자는 겁니다. 역사에 대한 해석이야 다양할 수 있지만 역사 자체가 사라지면 그마저도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최 작가는 아직도 소개하지 못한 유적이 많고, 또 새롭게 발굴될 유적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사의 가장 비참한 시기에 총칼을 들고 일제에 맞섰던 수많은 무명의 투사들을 되살리고 ‘독립전쟁’으로 제대로 평가되기까지 힘을 보태고 싶다”고 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