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티셔츠 제작 일을 맡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선배들은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느냐”며 “이렇게 시간을 주는 데가 있는 걸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핀잔한다. 최씨는 “계약서도 안 쓰고 시작했는데 첫 월급을 받고서야 월 급여가 50만원인 것을 알게 됐다”며 “시간이 지나 정규직원이 되면 100만원가량 된다고 들었다”고 씁쓰레했다. 갈수록 ‘열정페이’를 당연시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2014년 말 ‘견습 직원은 월 10만원, 인턴 직원은 30만원, 정직원은 100만원에 부린다’는 이야기가 인터넷을 달궜다. 유명 디자이너 이상봉씨에 관한 이야기였다. 패션노조와 청년유니온은 2015년 1월 ‘2014 청년 착취대상’에 이씨를 선정했다. 이씨는 곧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당시 이씨가 회장이던 한국패션디자인협회는 “업계 전체가 반성과 개선의 기회를 삼아야 한다”며 “업계 전체의 변화를 가져올 제도적 개선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해가 바뀌어도 피부에 와닿는 변화가 안 보인다.
올해 초 한국콘텐츠진흥원과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가 112개 패션디자이너 브랜드를 상대로 조사한 ‘브랜드 고용 실태조사’에 따르면 ‘비정규직(아르바이트생, 인턴 포함)’ 직원의 최저임금을 준수한다고 답한 업체는 48%에 그쳤다. 이들이 담당한 업무는 교육 목적이라고 보기 힘든 ‘단순 판매(14.3%)’와 ‘단순 보조(16.5%)’가 가장 많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부는 뒤늦게 교육 목적의 훈련생을 근로자와 구분해 지위와 처우를 보장하도록 ‘인턴 가이드라인’을 마련, 지난달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패션업계 노동자들이 대대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면서 대다수 유명 디자이너들은 공개 채용 공고를 내지 않는다”며 “수십년에 걸쳐 굳어진 노동착취 관행이 변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고 성토했다.
‘창가문답.’ 박근혜 대통령이 부처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한 말이다. “창조경제의 가시화는 문화에 답이 있다”는 줄임말이다. |
이는 비단 패션업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방송계와 미용업계, 만화계 등 고도의 전문성과 숙련도가 요구되는 동시에 노동집약적이기도 한 문화예술산업 전반은 대표적인 노동자 권익 및 보호의 사각지대다.
서울 신촌의 한 미용실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황모(24·여)씨는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하루 종일 서서 선배들을 보조하는 일만 1년째 하고 있다. 주말이나 휴일에도 쉰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지난달 설 연휴도 반납했다. 황씨는 “내년이면 정식 헤어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버틴다”며 “지금은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개인적 여건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문화예술산업 영역은 수개월부터 길게는 2∼3년간 ‘막내 생활’이나 인턴 생활을 거치는 것이 오랜 관행이다. 방송계 ‘막내 작가’, 만화계 ‘어시(어시스턴트 작가)’ 등 업계마다 인턴을 부르는 별도의 호칭이 고착화돼 있는 게 이를 방증한다. 대부분 육체·정신적 노동 강도가 세기 때문에 웬만한 열정이나 성취욕 없이는 이 기간을 버티지 못한다.
김모(25·여)씨는 패션업계에서 1년가량 인턴 생활을 하다가 포기했다. 다시는 패션 쪽에 발도 붙이지 않을 생각이다. 김씨는 “1년이라는 시간이 아깝지만 격무와 폭언이 반복되는 일상을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청년유니온 정준영 정책국장은 “일부 사용자는 아직도 월 30만∼40만원을 지급하는 사례가 나온다”며 “월급이 100만원 이하라면 최저임금 미달이기 때문에 법적 지위를 무급 인턴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노동 착취 문제가 개선되려면 현장에 대한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는 가이드라인 시행 전부터 지적됐던 문제이나 여전히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중앙대 이병훈 교수(사회학과)는 “정부의 인턴 가이드라인이 청년 노동착취 문제에 대응하는 ‘시늉’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한 근로감독이 가장 중요하다”며 “제도를 만드는 것도 좋지만 잘 지켜지는지 살피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다”고 지적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올해 상반기에는 홍보와 상담에 집중할 계획”이라며 “청소년 근로권익센터를 통한 상담 사례를 기반으로 하반기에 지방노동청 소속 근로감독관들이 본격적인 현장 감독에 착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시장의 유연화, 양극화 등으로 저임금·무급 인턴의 확대는 세계적인 추세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턴 제도에 따른 교육과 노동의 경계에서 적잖은 문제가 발생하고 해결 방안을 찾고자 고심하고 있다는 얘기다.
오래전부터 직업 훈련을 실시하고 있는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선진국에서는 인턴에게 별도의 법적 지위를 부여한다. 프랑스는 노동법에 인턴의 근로 시간과 업무 장소, 보고 의무 등 임금 외적인 부분에 대한 기준까지 명시했다. 현장 실습을 중요시하는 독일은 별도의 ‘직업교육법’을 마련해 교육이란 미명 하에 근로를 강요당하지 않도록 장치를 마련했다. 무급 인턴은 근로자가 아니며 업무가 교육의 범주를 벗어날 경우 근로자로 규정해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직업교육법에는 인턴의 수당 청구권이나 휴식 청구권 등도 명시돼 있다.
미국은 2000년대 이후 무급 인턴에 대한 논란이 확산하고 있다.이에 따라 공정근로법과 무급인턴 관련 규칙 등을 통해 인턴의 교육과 처우 등에 대한 기준을 짰다. 뉴욕시법에는 인턴 교육에 대해 ‘고용 가능성을 높여주는 교육 환경’, ‘인턴에게 이익이 되는 경험 제공’ 등 구체적 지침도 담겼다.
국내에서 인턴 사원을 모집한 시초는 1984년 럭키금성그룹이다. 한 달 기간인 인턴 업무는 대학생 아르바이트 수준이었지만 중견 사원에게 업무 지도를 받으며 실무경험을 쌓았고, 이 기간만큼 수습 기간을 줄여줬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등을 지나면서 기업의 정기 공채는 줄고 비정규직이 늘어났다.
청년유니온 정준영 정책국장은 “향후 인턴의 지위를 법 체계 내에서 신설해야 하는데 충분한 논의 없이 진행된다면 단순한 규제완화, 무급의 합법화에 그칠 우려가 있다”며 “업계별 특성이나 관행 등을 면밀히 따지고 해외 사례를 충분히 반영해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준영·김주영 기자 papeniqu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