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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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쓴다는 것은 망각의 기계를 돌려보는 행위”

김혜순 시인 ‘피어라 돼지’·‘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출간
김혜순(61) 시인은 자신이 사는 나라를 ‘애록’(AEROK)이라고 명명한다. 코리아(KOREA)의 알파벳을 거꾸로 뒤집은 이름이다. 소설가 최인훈은 ‘태풍’에서 ‘애로크’라고 썼다. 시인은 “우주에 홀로 떠 있는 지구별의 고독, 이 고독한 별 한 귀퉁이에 붙은, 조그마한 뼈대 같은 산맥들을 품은 나라, 애록”에서 “우주에서 유배 온 어느 곤충들처럼, 물 없는 우물에서 되돌아오는 메아리에 취한 것처럼, 고독에 취해 쓰는 것”이냐고 자문한다. 시보다는 ‘낮고’ 산문보다는 ‘높다’는 맥락에서 ‘발명’했다는 시산문집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문학동네)에 그렇게 썼다. 시산문집과 함께 열한 번째 시집 ‘피어라 돼지’(문학과지성사)도 나란히 출간했다. 애록에서 살처분당한 수백만 마리의 구제역 돼지들이 인간들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뼈아프게 성찰한다.

독특한 상상력과 쉼없는 갱신의 열정으로 달려온 김혜순 시인. 그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가/ 아무것도 소리치지 않기가// 시의 체면을 세워주기가/ 너무도 힘든 시절있었다”고 열한 번째 시집 서문에 썼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있지. 지금 고백하는 건데 사실 나 돼지거든. 있지. 나 태어날 때부터 돼지였어/ 더러워 나 더러워 진짜 더럽다니까. 영혼? 나 그런 거 없다니까.”

돼지가 선방에 앉아 벽을 마주보고 중얼거리는 독백이 장시 ‘돼지라서 괜찮아’로 흘러간다. 그 돼지는 “왜 내가 벽 보고 나를 버려야 돼요?/ 내가 어디 있어서 나를 버려야 돼요?/ 철근 콘크리트 사벽 황제 폐하!”라고 반항하기도 하고 “도대체 넌 누구야?/ 너 지금 나보고 죽자는 거야?/ 아님 나보고 먼저 죽으라는 거야?/ 타인의 고통을 먹고 사는 년아”라고 자학하기도 한다. 돼지가 된 시인은 “파리가 수행자들을 씹고 있는 방 안/ 큰 소리만 들어도 가슴에서 젖이 쏟아질 듯 조용한 방 안”에서 “하루만 걸러도 냄새 진동하는 이 짐승을 어찌할까요/ 하루만 먹이지 않아도 꽥꽥 소리를 지르는 이 돼지를 어찌할까요”라고 부르짖는다. 

급기야 “훔치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재판도 없이/ 매질도 없이/ 구덩이로 파묻혀 들어가야 한다”는 돼지 같은 인간, 인간 같은 돼지들의 부조리한 운명을 읊으며 절정으로 치닫는다. “무덤 속에서 운다/ 네 발도 아니고 두 발로 서서 운다/ 머리에 흙을 쓰고 운다/ 내가 못 견디는 건 아픈 게 아니에요!/ 부끄러운 거예요!/ 무덤 속에서 복부에 육수 찬다 가스도 찬다/ 무덤 속에서 배가 터진다”고 울다가 “피어라 돼지!/ 날아라 돼지!”라고 외친다. 시인은 “나를 피해 내 몸속으로 도망간 소금기둥” 같은 ‘일인용 감옥’에 스스로 유폐되어 “이 세상을 허리에 묶어서 끌고 가는 춤을 추는 중”이다.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는 2014년부터 문학동네 인터넷 카페에 ‘쪼다’라는 필명으로 연재한 글을 묶어낸 책이다. 자신의 독특한 시 세계를 상대적으로 쉬운 산문시 형식으로 풀어간 글이다. 연재를 마칠 때까지 ‘김혜순’이라는 이름을 감추었고 독자들에게도 혹시 눈치 채거든 전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순전히 글로만 소통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딸인 화가 ‘이피’의 드로잉도 곁들였다.

도저한 부정정신을 담은 호명 ‘않아’를 내세워 시론을 전개하는 그네는 “시를 쓴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을 바퀴살 가운데에 둔 것처럼 망각의 기계를 전속력으로 돌려보는 행위”이며 “실용적인 잣대로 판단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야기의 재료로 삼을 수도 없는 저 부재를 생산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독자를 많이 얻기 위한 시는 이와 다르다. “형식이 아니라 내용, 시적 자아의 부단한 정서적 흘러넘침이거나 촌철살인의 아포리즘. 너무 많이 존재하는 시적 화자의 비애와 센티멘털. 거기서 번져나오는 위장된 성스러움, 그러나 한 꺼풀 벗겨 보면 참을 수 없는 나르시시즘으로 떨리는 살들. 순진함이라는 그 허영심.”이라고 일갈한다. 그렇다고 도망가는 것만이 최선일까.

“시에 대한 남다른 생각 때문에 몸과 정신을 망가뜨리는 도망이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난해시를 쓰는 것 같은 것. 온전히 이해받는 자신을 경멸하다 못해 스스로 글 속에서 길을 잃는 도망. 온전히 이해받음으로써 넝마가 되는 시간보다는 이해를 피해 죽어가는 도망. 심오한 괴물이 됨으로써 애록 독자에게 불심검문을 당하거나 그 괴물의 권태를 평생토록 견디는 희생.”(‘도망중’)

올해 프랑스에서 시집 세 권을 동시에 선보이는 김혜순은 “이 글들은 장르 명칭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멀리 존재하는 미지의 나라, 애록AEROK에서 가장 멀리 있는 자리, 생각만 해도 현기증나는 그 멀고먼 나라, 시의 나라를 그리워하면서 쓴 글”이라며 “쓰는 동안에 거룩함이라는 쾌락, 연민이라는 자학, 건전함이라는 기만에만은 빠지지 말자고 다짐했다”고 ‘않아’의 ’마지막 말’에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