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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驚蟄)이 지나니 바람의 숨결이 달라진다. 몸을 움츠리게 했던 추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두꺼운 점퍼가 슬슬 부담스러워진다. ‘추운 겨울 따뜻한 집만 한 곳이 어딨어’라며 겨우내 방구석을 맴돌던 우리 마음도 슬슬 봄 소식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봄을 찾아 어디론가 가고 싶은 듯, 추위에 봉인됐던 마음이 들썩이고 있는 것이다. 봄이 다른 계절보다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봄이 주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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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양산 원동면 순매원의 매화꽃이 활짝 피어 봄이 왔음을 알리고 있다. 순매원 매화밭 옆으로 기차가 지나가고 낙동강이 유유히 흘러 봄심을 한층 자극한다. |
산과 들에 핀 한두 송이 꽃보다는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보고 싶었다. 한두 송이 꽃으로 찬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이 봄을 만끽하기에는 왠지 성에 차지 않았다. 봄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활짝 핀 꽃들을 봐야만 할 것 같았다.
남쪽으로 향했다. 봄이면 꽃이고, 꽃이라면 따뜻한 남쪽이 먼저일 테니. 그렇다면, 그윽한 향기와 희고 붉은 빛깔로 봄 소식을 전하는 매화가 제격이다.
대나무·소나무와 함께 세한삼우(歲寒三友)로 꼽히고, 난초·국화·대나무와는 사군자로 묶이는 매화. 겨울 추위가 다 지나간 후 완연한 봄날에 피어도 될 텐데, 매화는 때 아닌 봄 추위를 무릅쓰며 ‘봄이 이제 시작됐노라’는 듯 제 먼저 꽃을 피워 봄을 알린다. 아직 다 오지 않은 봄을 기다리는 꽃들에게 ‘어여 뒤쫓아 오라’고 봄의 전령사 역할을 하는 듯하다.
봄을 찾아 내려간 남쪽은 경남 양산시 원동면의 순매원과 영포마을이다.
두 곳은 차로 10여분 거리지만 봄을 맞는 분위기는 사뭇 차이가 있다. 낙동강변에 자리한 매화나무밭 순매원은 700여그루의 매화나무가 심어진 밭과 강 사이에 철길이 놓여있다. 경부선 기찻길이다. 불현듯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생각나는 기차와 유유히 흐르는 강 풍경, 그리고 만개한 매화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다. 봄의 낭만에 푹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을 품고 있다.
“기차 온다”는 누군가의 외침에 상춘객들의 눈은 일제히 한 곳으로 쏠린다. 옛 증기기관차처럼 연기를 뿜으며 내달리는 ‘칙칙폭폭’ 소리는 들리진 않는다. 하지만 저 멀리 산등성이와 강 사이로 난 철길을 따라 기차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마음이 이내 쿵쾅거린다. 그 기차가 KTX면 불과 수초 만에 매화밭을 스쳐 지나간다. 순식간이다. 무궁화호라면 그나마 기차가 있는 풍경이 뿜어내는 봄의 낭만을 몇 초라도 더 오래 느낄 수 있다. 순매원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떨어진 원동역에 무궁화호가 정차해 속도를 줄이는 덕분이다.
기차 안의 여행객이야 목적지에 가 닫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겠지만, 매화밭 상춘객들은 좀 더 이 풍경을 부여잡고 싶어진다. 해가 갈수록 짧아지는 것 같은 봄 절기를 오래 느끼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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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양산 원동면 순매원의 매화꽃이 활짝 피어 봄이 왔음을 알리고 있다. 순매원 매화밭 옆으로 기차가 지나가고 낙동강이 유유히 흘러 봄심을 한층 자극한다. |
영포마을은 대부분 매화밭이다. 야산 중턱에 2만여 그루의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다. 경남에선 가장 큰 매화밭이다. 원동역에서 버스가 운행되는데, 10여분을 타고 가다 보면 창밖 양쪽 산비탈에 희고 붉은 매화꽃들이 여행객을 환하게 맞는다. 여행객을 위해 따로 길을 꾸며 낸 것 같지는 않지만 1㎞가량 산책로가 조성돼 걷다 보면 풍성한 매화 향에 흠뻑 빠질 수 있다.
눈과 코로만 봄을 느끼기 아쉽다면, 순매원에서 영포마을 가는 길에 함포마을을 들러보자. 봄의 상큼함을 한껏 느낄 수 있는 미나리 수확이 한창이다. 마을 곳곳 비닐하우스 미나리꽝에서는 싱그러운 초록빛이 새어나오고 있다. 청정 지하수로 키워 물에 한 번 씻으면 준비는 끝이다. 장에 푹 찍어 한입 물면 ‘아삭’ 씹히는 소리에 입과 귀가 즐거워진다. 그냥 먹어도 좋지만 삼겹살을 곁들이면 이보다 더한 봄의 진미가 있을까 싶다.
양산=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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