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청년이 미래다] "빚갚다 늙는 건가"… 인생 저당 잡힌 '쳇바퀴 청춘'

④ 빚더미 떠안은 ‘마이너스 세대’… 학자금 빚 갚느라 질 낮은 일자리 전전
푸릇푸릇한 캠퍼스만큼이나 싱그러운 대학 새내기였던 이지영(26·여·가명)씨는 2009년 1학년 1학기부터 빚을 냈다.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고 등록금은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이씨는 첫 학기에 입학금 100만원과 등록금 350만원, 총 450만원을 시작으로 8학기 내내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7년 거치, 10년 상환, 중도상환도 가능한 조건으로 대출을 받아 원하면 취직하자마자 빚을 갚을 수도 있고, 만약을 대비해 소액씩 갚아나갈 수도 있으리라 여겼다. 생활비 대출을 50만∼100만원씩 받은 적도 있다. 아르바이트만으로 생활이 힘들까 두렵던 차에 학자금 대출을 받을 때만 가능한 생활비 대출이 있다고 들어 기회처럼 느껴졌다.

'
◆악순환의 시작 학자금 대출…꿈을 좀먹다

이씨가 대학을 다니던 당시 정부도 학자금 대출을 장려했다. 대출을 ‘혜택’이나 ‘지원’이라고 홍보했다. 정부는 4000억원 수준이던 학자금 ‘지원’ 예산을 그해 7000억원대로 늘리는 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호기롭게 발표했다.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일만은 절대로 없도록 하겠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학자금 지원을 대폭 늘리기로 했다. 이번 조치를 통해 능력과 의지만 있으면 교육을 통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2008년 11월 교육과학기술부)”

정부의 ‘지원’에는 대출이자를 깎아주고 학자금 대출도 늘리는 내용도 포함됐다. 그해 5월에는 대학생의 학자금 대출업무를 전담하는 한국장학재단이 설립되기도 했다.

졸업 후 이씨는 매달 13만원을 상환했다. 시민단체에서 꿈에 그리던 일자리도 찾은 듯했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보람도 있고 업무환경에도 만족했지만 약 150만원 월급으로 집세를 내고 빚을 갚으면서 도저히 장래를 계획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빚을 빨리 갚고 싶었다.

이씨는 시민단체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빚 3000여만원 중 350만원을 중도상환했지만 돈을 벌어도 삶이 나아진다는 느낌보다 쳇바퀴를 도는 듯했다. 이씨는 결국 시민단체를 그만두고 현재 급여가 더 나은 곳을 찾고 있다. 첫 대출 이후 7년, 지금 이씨는 2700여만원 빚을 진 취업준비생이다. 이씨는 “대출은 내 삶의 족쇄”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학자금 대출에서 빚의 악순환 시작→저임금이나 질 낮은 일자리에 취업했다 그만두길 반복→ 정상적인 삶을 유예’는 일종의 패턴으로 자리 잡았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23일 “청년들이 빚 부담이 없다면 구직에서도 좀 더 여유가 생기고, 당장 소득이 필요해 비정규직으로 들어가거나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 고용시장 구조도 조금이나마 개선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청년 입장에서는 대학교까지 축적해온 인적자산을 낭비하고, 출산과 육아 등을 미루거나 포기하며 인생설계를 제대로 하기 어려워지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진단했다.

◆아르바이트로 발버둥치다 무력감… ‘시작부터 마이너스’세대


대학원생 박주원(27·가명)씨가 첫 대출을 받은 건 대학교 2학년이던 2010년이다. 그해 한국장학재단의 연간 총 대출규모는 2조7761억원으로 사상 최고치였다. 첫 3학기는 부모님이 모아둔 돈으로 다녔지만 더 이상은 안 됐다.

박씨는 전액장학금을 받아 학자금 대출을 바로 갚기도 했고 과외와 카페, 번역 아르바이트까지 했다. 그래도 결국 대출 1000만원이 남았다. 동생의 대출 1800만원까지 더하면 박씨 가정의 대출은 이미 3000만원에 달한다.

취업이 되지 않아 졸업을 미루고 있는 대학생 김승현(27·가명)씨도 2013년, 3학년 때 집에 빚이 생기면서 부모가 더 이상 등록금을 댈 수 없자 대출을 받았다. 김씨는 “아르바이트로 생활비 대기도 빠듯해 등록금 모으기는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4학년인 이듬해에는 취업준비로 학원비 지출까지 늘어 생활비 70만원도 대출받았다. 국가장학금을 4차례에 걸쳐 500만원 받았지만 대출이 900만원 남았다.

청년은 등록금은 물론 일자리를 구하기 위한 추가 교육비까지 ‘고비용 저소득’ 구조에 빠진 지 오래다. 이민환 인하대 글로벌금융학부 교수는 “생애 전체를 봤을 때, 젊었을 때 차입을 하고 30∼50대에 일을 해서 노후를 대비해야 하는데, 요즘 청년은 취직이 언제 될지 모르고 일자리도 불안정해 채무상환 능력이 점점 없어지는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이들이 느끼는 무력감은 심각하다. 박씨는 “선배들 특강을 들어보면 옛날에는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내는 게 가능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빚을 지는 걸 누가 좋아하겠나. 억울하고 짜증나다가 어느 순간 체념했다”고 말했다. 그는 “학자금 대출을 다 갚아도 집 산다고 또 빚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빚갚다 죽는 건가’ 싶다”며 한숨을 지었다.

클릭하면 큰 그림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영섭 청년지갑트레이닝센터장은 “1000만∼3000만원 부채가 기성세대에게는 큰 액수가 아닐 수 있지만 청년에게는 사회진출 시작단계에서 굉장한 중압감이자 무력감을 주는 요소”라며 “액수보다 의미를 봐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현재 청년층은 대학생 외에도 일자리, 주거, 복지 등 복합원인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저소득과 고비용, 신용하락의 덫에 빠진 마이너스 세대”라고 규정했다.

◆생활비 대출에 가계빚 전이까지


최근 청년 부채는 생활비 대출 급증 문제가 급속히 심화됐고 가계부채까지 전이되고 있다. 지난해 금융감독원이 더불어민주당 민병두 의원에게 제출한 ‘은행권 대학(원)생 대출 현황’에 따르면 이들의 학자금 외 용도로 은행 대출액수만 1조839억원으로 사상 처음 1조원을 넘었다.

한 센터장은 “부모세대도 신용을 다 써버리자 자녀의 신용을 끌어들이거나 자녀 신용으로 대출받은 뒤 가족이 해체돼 가족부채가 전이되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한계에 이른 가정의 마지막 몸부림인 셈이다. 그는 “일자리와 주거, 가계부채 문제 등이 마지막으로 청년부채로 가시화된 만큼 청년부채에 한해 특별법이나 조정기구를 통한 과감한 채무조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예진·김주영 기자 y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