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은 합당 3년 만에 호랑이를 잡는 데 성공했고 문민정부 출범을 알렸다. 대대적인 변화와 개혁이 추진되면서 ‘3당통합 신당 선언’이 비로소 실현되는 것 같았다. ‘중도민주 세력의 대단합으로 큰 국민정당을 탄생시켜 정치적 안정 위에서 새로운 정치질서’가 확립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부풀게 했다. 그러나 보수의 변화는 거기까지였다. 문민정부 종료와 함께 보수는 다시 3당통합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 당파적 이해로 분열하고 대결하는 정치에 종지부를 찍지 못했다. 지난날의 배타적 아집과 독선, 투쟁과 반목의 구시대 정치를 활활 타는 용광로 속에 불사르지도 못했다.
김기홍 논설실장 |
공천 난장은 새누리당의 수준을 확인시켜 주었다. 칼을 맘껏 휘두른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은 “당 정체성에 적합하지 않은 행동을 한 사람은 응분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했다. ‘실용주의 정신과 원칙에 입각한 통합과 조정의 리더십으로 합리적인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는 공당임을 부정한 것이다. 친박의 친박에 의한 친박을 위한 사당(私黨)임을 선언한 것이다. 그 뒤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것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던 블록버스터급 액션 장면이었다. 친박의 불통 리더십, 이한구의 독선 리더십이 낳은 예고된 야단법석이다.
새누리당이 참 좋은 보수로 바뀔 수 있는 좋은 기회는 있었다. 여당도 놀라고 야당도 놀란 지난해 4월 유승민 전 원내대표의 대표 연설이었다. 지난 대선에서 김종인표 ‘경제민주화‘로 유권자 마음을 얻었듯이 유승민표 ‘ 따뜻한 보수’를 끌어안았더라면 보다 품격 있고 매력 있는 보수를 보게 되었을지 모른다. 유승민표 보수가 설령 ‘국민도 속고 나도 속은’ 경제민주화 공약의 전철을 밟더라도 ‘진영을 넘어 미래를 위한 합의 정치’를 향한 희망의 불씨는 남겨놓았을 수 있다. 보수는 새로운 지평을 열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박 대통령과 친박은 레이저 광선으로 유승민과 따뜻한 보수를 ‘배신의 정치’로 낙인찍었고 보수는 다시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보수는 무능한 데다 그렇게 도덕적이지도 않다. 생산적인 비전도 품지 못하고 있다. 친박의 패권 공천은 보수와 여당의 그런 진면목을 드러냈다. 지금의 여당을 믿고 그들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도 좋은 건지 의심하는 국민이 늘었다. 김무성 대표는 어제 중앙선대위 발족식에서 “과거에 얽매인 세력, 국정에 브레이크를 거는 세력을 응징하자”고 야당을 겨냥했다. 그 말을 듣고 제 발 저린 여당 인사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보수에게는 콘크리트 지지층이 있다. 정치는 생물이고 국민 마음은 바람 앞의 갈대 같은 것이다. 단단한 콘크리트가 언제 어떻게 균열이 일어나 부서질지 모른다.
솔로몬 왕 앞에서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자기의 아기라고 주장하는 두 어미가 있었다. 우리 앞에서 국민이 자신의 아기라고 주장하는 새누리당에게서 아기를 포기할 테니 거짓 어미에게 주라고 애원하는 참어미의 진심을 읽을 수 없다. 보수가 달라지지 않으면 그곳에선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김기홍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