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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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리뷰] 신 생태계 ‘공룡 대기업’이 사는 길

달라진 경제환경 벤처와 협력이 필수
공생토대 만들어야 창업러시 선순환
최근 많은 전문가가 제4차 산업혁명이 도래함에 따라 기존의 규모 중심 기업 판도가 급속도로 변화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AI(인공지능)기술을 통해 전 세계 소비자의 욕구를 찾아낼 수 있고, 3차원(3D)프린터를 활용해 누구나 제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되는 신세계에서는 그동안 산업을 선도해 온 거대기업이 점차 자신의 지위를 잃어가고 그 자리를 혁신적인 벤처기업이 채워나갈 것이라는 예측이다.

일반적으로 전략경영 분야에서 말하는 자원기반 관점에서는 규모가 큰 기업일수록 기술과 자원을 많이 지니고 있기에 규모가 작은 기업보다 혁신과 경쟁에 유리하다고 한다. 축적된 기술과 자원을 활용함으로써 점진적 혁신을 이루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기술이 창발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기업의 규모가 혁신의 방해물이 되기도 한다. 기업의 규모가 커질 경우 비대해진 조직구조로 발생하는 관성과 기존의 기술에 집착하는 경로 의존성의 덫에 빠지게 돼 급진적인 기술적 변화를 따라가지 못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4차 산업혁명의 대표적인 기술적 흐름으로 손꼽히는 전기자동차와 AI 기술은 기존의 거대 자동차 제조사와 소프트웨어 개발사가 아닌 테슬라와 딥마인드 테크놀로지(현 구글 딥마인드)와 같은 혁신적인 벤처기업이 주도하고 있다.

강진아 서울대 교수·기술경영학
물론 대기업도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거대해진 조직구조와 확고한 기존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대기업에 벤처기업의 장점을 모방해 비슷한 전략을 구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사이다. 이와 같은 위기 속에서 대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경쟁 환경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즉 벤처기업을 경쟁의 대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협력의 대상으로 인식함으로써 그들의 장점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능동적인 자세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인터넷 검색 시장의 제왕에서 모바일 플랫폼의 거인으로 거듭난 구글의 안드로이드 인수는 대기업이 벤처기업을 활용해 급진적인 혁신을 이끌어 낸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2000년대 중반 웹 기반의 인터넷 산업을 넘어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기 위해 스마트폰 시장에 관심을 보이던 구글은 2005년 7월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 출신의 엔지니어인 앤디 루빈이 설립한 모바일 소프트웨어 벤처기업 안드로이드를 5000만달러에 인수했다. 비록 제대로 된 제품이나 서비스를 가지고 있지 않은 안드로이드였지만 구글은 아이디어의 창의성과 비즈니스 모델의 가능성만 보고 과감한 투자를 결정했다. 그 결과 구글은 애플과 함께 모바일 플랫폼 시장을 양분하는 구글-안드로이드 진영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처럼 대기업이 벤처기업을 활용해 급진적 혁신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떠한 벤처기업이 유용한 기술과 역량을 지니고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센싱(sensing) 과정이 필수적이다. 요컨대 기업벤처캐피털(CVC) 투자 전략 등을 통해 벤처기업에 선투자를 함으로써 기술 잠재력을 확인하고 이후 이들이 지닌 기술의 활용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되면 인수를 통해 습득하는 옵션 투자 전략을 활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한국의 기업은 벤처기업을 전략적 협력관계를 맺을 수 있는 파트너가 아닌 기술 갈취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다. 실제로 한국 산업 내에서 발생하는 기술 유출 건수의 80%가 중소 벤처기업을 대상으로 이뤄진다는 통계가 이러한 인식을 대변한다.

대기업은 벤처기업이 지니고 있는 기술의 가치를 공정하게 평가하고 이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 인수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대기업의 급진적 혁신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더욱 많은 예비 창업자들이 투자 회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적극적으로 창업을 시도하도록 만듦으로써 건강한 경제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강진아 서울대 교수·기술경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