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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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문화재] 의궤를 예술품으로 승화시킨 도침

조선 왕실문화의 보물창고로 알려진 조선왕조 의궤(儀軌). ‘의궤’는 의식절차를 마차 바퀴가 지나간 것처럼 그대로 따른다는 의미로, 불교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통일신라시대 때부터 불교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매뉴얼을 일컬어 의궤라고 불렀다.

조선왕조 의궤는 행사 준비과정을 마치 비디오를 보듯 날짜 순으로 재구성할 수 있고, 오늘날 사라진 물품 제작 공정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돗자리, 방석, 썰매 등 소소한 물품의 제작과정을 살피다 보면 ‘도침’이라는 용어에 눈길이 멈춘다. 도침은 두드린다는 의미의 ‘도(搗)’자와 다듬잇돌을 뜻하는 ‘침(砧)’자가 합쳐진 말로, 닥종이를 두드려 섬유 사이의 공간을 메우고 표면을 편평하게 만들어 종이를 질기고 보존성이 좋게 만드는 가공법을 일컫는다.

왕실 행사를 치르기 위해서는 수많은 종이가 필요했다. 관청끼리 주고받을 문서, 장인이 설계하거나 도안을 그릴 종이, 의궤 제작에 사용할 종이 등…. ‘경국대전’에 기록된 종이가 수십 종에 달하는 것만 보아도 그 쓰임이 얼마나 다양했는지 알 수 있다. 조선후기 학자 서명응의 설명에 따르면 도침은 100여장 단위로 종이를 포개 앞뒤로 수백 번씩 돌로 두드려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이런 이유에서였을까. 왕실에서는 도침을 장인이 아닌 죄수들에게 맡겼다. 조지서(造紙署: 종이 만드는 관청)에서 도침할 장소를 마련하면 죄수들이 일렬로 쪼그리고 앉아 하루 종일 종이를 두드렸다. 이들에게는 하루에 한 끼만 제공되었고,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 곳에서 종이를 두드리다 보면 열사병으로 쓰러지기 일쑤였다. 도침은 조선시대 죄인을 다스리기 위한 중노동이었던 것이다. 신분이 낮은 사람뿐만 아니라 관료와 내시, 심지어 왕의 혈족인 종친도 잘못을 저지르면 도침장에 끌려 나왔다.

조선 백성들이 흘린 눈물과 땀은 의궤 속 종이가 오늘날까지 변색되지 않고 견고하게 버티게 된 힘이 되었다. 의궤를 숭고한 예술품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이유다.

황정연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