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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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취재] "'흙수저'가 사라지는 기적을 바라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

“‘흙수저’가 사라지는 기적을 바랍니다.”

12일 경희대 크라운관 공연장. 사회자가 연설문 제목을 읽자 여기저기서 폭소와 박수가 터져나왔다. 대회장을 가득 채운 1000여명의 청중 앞에서 떨릴 법도 한데 단상에 선 이집트인 유학생 사라 압둘하니드(24·여)는 당당하고 거침이 없었다. 그는 이날 열린 ‘세계 외국인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서 ‘흙수저’를 주제로 발표를 준비했다. 3분 남짓 짧은 연설 준비였지만 2주일 넘게 잠을 설쳐가며 원고를 작성했다고 한다.

12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로 경희대학교 크라운홀에서 열린 '제19회 세계 외국인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서 참가자가 발표를 하고 있다.
이제원기자
4년 전 정부초청 장학생으로 온 사라는 “한국 친구들을 만나면 늘 ‘취업’과 ‘학점’ 고민을 한다”며 “현실에 굴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준비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본 한국 젊은 세대의 고민이 이집트와 다르지 않다고 했다.

“경제 재건의 걸음마를 뗀 지 얼마 안 된 이집트도 양극화가 심해요. 이집트에서는 ‘흙수저’를 ‘타히트일쓰프르’라고 합니다. 한국이나 이집트나 ‘계층 피라미드’가 있어요. 한국에서 알게 된 ‘삼포세대’란 말이 가슴을 쳤던 것은 그래서예요.”

어색한 표현이 간간이 나왔지만 청중 누구도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사라는 “도전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원망하는 ‘흙’에서도 열매가 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다”며 발표를 마무리했다. 우레 같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외국인들의 유창한 한국어 실력에 감탄도 이어졌다. 지난해 중국에서 전북대로 유학 온 초이 씨앤메이(21·여)가 입을 떼자 객석 여기저기서 ‘오, 오’하는 탄성이 터져나왔다. 표현과 발음이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그는 어릴 때 함께 한 한국인 동네 친구 덕분에 한국어를 배웠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한글의 매력에 푹 빠졌다는 씨앤메이는 “중국어와 다르게 한글은 띄어쓰기 하나에 늬앙스가 달라지는 등 상당히 과학적이고 재밌다”며 “고향 친구들에게도 ‘한글’을 꼭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12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로 경희대학교 크라운홀에서 열린 '제19회 세계 외국인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서 관객들이 발표자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이제원기자
하지만 그는 정작 한국인 친구들이 한글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외국인들이 한국어 공부를 할 때 일부러 최신 댓글을 찾아봐요. 처음에 ‘커엽다’가 무슨 말인지 몰라 한참을 뒤졌습니다. ‘귀엽다’를 그렇게 쓴 것이었어요. ‘멍청하다’를 ‘댕청하다’라고 쓰기도 하고 한글 파괴가 심각한 것 같아요.”

씨앤메이는 “중국에 돌아가 내가 보고 느낀 한국을 전해줄 것”이라며 “한국인들은 한글을 더 소중히 아껴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날 대회에는 43개국에서 온 외국인 1325명이 지원해 결선에 오른 15개국 17명이 참가했다. 걸쭉한 부산 사투리를 쓰는 중국인 여고생부터 연설을 하다 말고 한국 노래를 부른 방글라데시인까지 이색적인 연설에 내내 웃음과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독다니엘’으로 불리는 방송인 다니엘 린데만(31)도 2009년 이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바 있다.

심사를 맡은 경희대 최상진 교수(국어국문학)는 “한국을 사랑하는 외국인들의 깊은 애정과 따끔한 충고를 들을 수 있었다”며 “외국인이 본 한국이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어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