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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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방폐물관리 로드맵 늦었지만 다행

원자력발전 38년 만에 우리나라 고준위방폐물 관리의 중장기 정책 시간표가 발표됐다. 국가가 책임지고 국민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는 원칙을 재천명하고 관리시설 부지 확보를 관련 법과 제도에 따라 한다는 것이다. 또 각 관리시설 확보의 소요기간과 일정을 밝혔다. 단계별 관리시설 건설 계획에서 눈여겨볼 점은 부지 선정 준비기간을 12년으로 잡았다는 점이다. 과거 일사천리로 정책을 추진해온 관행에서 벗어나 해당지역 주민의 수용성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일정이다. 반면 건설기간은 공론화위원회 권고안보다 7년 단축했다. 현실적 시간표를 작성했다는 의미이며, 이 일정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한 집중된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각오로 보인다. 당장 3년 뒤 월성원전부터 고준위방폐물을 보관 중인 단기저장시설 포화가 예상되지만 상황논리에 쫓겨 다급하게 일정을 잡거나 정책입안자 입장에서의 시간표로 현실감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여러 가능성을 포괄한 탄력적이고 열린 정책이라는 점에서 안도한다. 지난 33년간의 경험이 녹아있지만 급변하는 기술과 해외 동향을 예의 주시해야 하는 특수성을 반영한 결과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해 원자력발전을 시작한 지 올해로 60년이다. 일부에서는 이제 겨우 60년인데 앞으로 몇 만년 관리할 고준위방폐물의 기술력을 어떻게 믿느냐고 의혹을 제기하지만 그 사이 국제 공동연구 등을 통해 관련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기술은 진보하고 역사는 흐른다.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상정하고 걱정부터 하는 일은 모두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소모적이다.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된 원전 사고와 폐기물 관리는 별개의 것이다. 고준위방폐물은 위험하지만 더 위험한 물질도 관리할 공학적 방법론은 있다. 더구나 고준위방폐물 관리는 한 정부가 자체적으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 국제 공동연구, 정보교류, 규제·감시를 통해 인류가 해결해야 할 공통의 과제다.

황주호 경희대 국제캠퍼스 부총장·원자력공학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관점과 소통이다. 과학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는 시대인 만큼 공학자부터 기술 우위적 인식과 커뮤니케이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정보를 투명하게 제공해야 한다. 정부도 국민과 해당지역 주민의 수용성을 명시한 만큼 이제는 전문가가 나서야 한다. 지하 암반과 차폐를 아는 전문가 입장에서는 심층 처분의 안전성을 충분히 공감하지만 국민 입장에서는 걱정스럽다. 더 알기 쉽게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접촉해야 한다. 원전을 4기만 갖고 있는 핀란드가 지난해 세계 최초로 고준위방폐물 영구처분장을 짓기로 결정한 것은 전문가의 노력, 국민의 신뢰, 지하연구소를 견학하고 소통했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다. 우리 앞에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 앞에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가고 있었고 우리 모두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프랑스혁명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로 당대 영국 사회를 해부한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의 도입부는 여전히 회자된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결정은 늘 이렇게 극단으로 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시간표를 마련한 만큼 앞으로의 선택은 모두의 몫이다.

황주호 경희대 국제캠퍼스 부총장·원자력공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