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적은 것보다는 많은 것, 큰 것을 선호한다. 그로 인해 생명체의 어머니인 대지를 그 자식인 인간이 마구잡이로 훼손하는 상황을 법정 스님은 경계했다. 커다란 생명체인 대지는 단순한 흙더미가 아니다. 그러기에 생태윤리가 절실히 요구된다. 생태윤리의 실천을 위해 법정 스님은 첫째, 색다른 물건을 보고 현혹돼 충동구매를 하지 말자. 둘째, 자동차를 부나 지위의 상징으로 여기지 말고 소형차를 타자. 셋째, 광고는 소비주의를 부추겨 생태적 위협을 가져올 수 있으니 광고에 속지 말자. 넷째, 꼭 필요한 것만을 갖고 불필요한 것에 욕심을 부리지 말자고 했다.
어찌 보면 시대착오적인 제안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실상 이는 소비사회의 핵심윤리일 수 있다. 과시 소비, 유행에 따른 대량소비의 후폭풍은 필연적으로 대량 폐기를 낳는다. 욕망의 조절로 쓰레기를 줄이고 자연과 인간을 동시에 살릴 수 있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불교 경제학의 맥락에서 보면 “인간 삶의 목적은 최소한의 소비로 최대한의 웰빙에 도달하는 것으로, 그것을 위해서는 적정 생산 틀로 소비를 극대화하려 하지 않고 적정 소비 틀로 만족을 극대화하는 게 중요하다.”(문순홍의 ‘생태학의 담론’)
무소유의 철학을 강조한 법정 스님은 있는 그대로의 궁극적 존재인 자연상태를 중시했다. 당장의 편리를 위해서 문명의 이기를 많이 사용한다면 그만큼 자연과 인간이 병들 수 있다고 했다. 그가 보기에 문명은 “서서히 퍼지는 독약으로 문명에서 온 질병을 또 다른 문명으로는 치유할 수 없다. 오직 자연만이 그 병을 고칠 수 있다. 문명의 해독제는 자연밖에 없는 것”이다.
미세먼지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다. 미세먼지야말로 ‘서서히 퍼지는 독약’ 그 이상임을 우리는 잘 안다. 사정이 녹록지 않기에 근본처방 문제를 놓고 토론이 많다. 지역과 국가 단위의 법적 제도적 장치들에서 전지구적 차원에서의 생태적 협력에 이르기까지 현안이 만만치 않다. 그 처방의 적절성 여부를 따지고 비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당장 지금, 여기서,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윤리감각을 실천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런데 아직까지 많은 사람은 그 미세먼지의 원인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법정 스님을 떠올리게 된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적은 것이 맑고 향기롭다.
우찬제 서강대 교수·문학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