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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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의 일상 톡톡] "갑질은 정말 인간의 본성일까?"

갑질은 우리네 인간의 본성일까요? 강자는 약자를 지배하고, 약자는 강자의 지시를 군말없이 따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같은 물음에 확실한 정답을 내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서 다들 한번쯤은 부딪치는 이슈임에도 명쾌한 답변을 하기 어려운 현실인데요. 특히 민감한 테마일수록 더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갑(甲)질' 사례를 살펴보고, 그 원인에 대해 알아 봤습니다.

기업체의 갑질 못지않게 '고객 갑질' 이슈가 불거지고 있는 가운데, 서비스직 등에 종사하고 있는 감정 노동자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는 공감대가 점점 커지고 있다.

실제 최근 롯데그룹이 발간한 '당신 마음 다치지 않게'라는 제목의 책에는 롯데 계열사 직원들이 고객을 응대하면서 서비스 현장에서 실제로 겪은 다양한 '갑질' 사례가 실려있다. 이 책은 '감정 노동'에 시달리는 현장 서비스직 종사자들의 고충과 경험담을 소개하면서 상황별 대응 방법도 조언하고 있다.

◆"이뻐서 그러는데 뭘 그리 놀라냐고?"

롯데마트 매장 고객서비스 센터에서는 여직원이 잘못 계산된 부분을 정정한 뒤 영수증과 카드를 돌려주자 "아유 예쁘기도 하지. 내 볼에 뽀뽀 좀 해 봐라"고 말한 남성도 있었다. 이 남성은 직원이 당황하자 "이뻐서 그러는데 뭘 그리 놀라나"라며 오히려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을 통한 성폭력뿐 아니라 실제로 직원에게 완력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롯데리아의 모 지점에서 한 젊은 여성고객이 아메리카노 커피를 주문한 뒤 "크림을 넣어달라"고 요구했다. 여직원이 "고객님 저희 매장에는 크림이 없습니다만, 우유를 좀 넣어드릴게요"라고 말하자 이 고객은 "커피 파는 데서 크림이 없다는 게 말이 돼? 크림 달라니까"라고 소리치며 뜨거운 커피잔과 쟁반을 바로 앞 직원들에게 집어 던졌다.

소비자들이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와 협박으로 직원들에게 모멸감을 주는 사례도 부지기수였다. 한 여성은 다짜고짜 롯데면세점에 전화해 "우리 남편이 X버리 가방을 인터넷 면세점에서 사서 내게 선물했는데 이건 가짜다. 내가 디자인 전공해서 명품에 대해 잘 아는데, 로고나 원산지 표기 등이 진품과 다르다"고 항의했다.

고객이 전화를 끊지 않고 끈질기게 진상 규명을 요구하자 결국 면세점 직원들은 판매 상품과 똑같은 가방을 들고 대구에 있는 해당 고객의 집까지 찾아가 제조 시점 차이에 따라 디자인이 부분 변경됐다는 사실을 직접 설명했다.

◆갑질 고객, 비상식적인 언행…대가 톡톡히 치러야

하지만 고객은 그냥 수긍하지 않고 욕설과 함께 "며칠동안 이 문제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 바뀐 부분을 써놔야 할 거 아니냐"고 따지면서 직원들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롯데면세점 직원들은 진품임을 증명하러 대구까지 내려가 고객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롯데기업문화개선위원회가 펴낸 이 책은 '고객 갑질' 상황별 대응 방법도 조언하고 있다. 롯데 매뉴얼대로라면 앞으로 소비자를 상대하는 롯데 계열 매장이나 서비스센터 직원들은 고객들의 '갑질'에 무조건 인내하고 순종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갑질 고객도 자신의 비이성적인 언행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를 수 밖에 없다.

이같은 롯데의 조치에 대해 재계에선 우리 사회의 비정상적인 악습을 바로잡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란 의견이 나오고 있다. 실제 롯데 매뉴얼에 따르면 상품 상담·문의 과정에서 명백한 성희롱 행위가 드러날 경우 "고객님 업무와 상관없는 이야기는 자제해주십시오. 지속적으로 말씀하시면 상담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전화 상담이라면 지적과 함께 전화를 먼저 끊어도 상관없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폭력 행위에 대해서는 절대로 폭력으로 대응하지 말고 매니저 등 책임자나 안전요원에게 먼저 연락을 취하는 게 바람직하다.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라면 당연히 경찰서나 파출소에 신고해야 한다. 향후 법적 처리는 회사 차원에서 대응할 문제이므로 개인적 불이익을 염려해 신고를 꺼릴 필요가 없다.

아울러 이 책은 직원들이 고객의 언어적·물리적 폭력으로 심리적 상처를 입었을 때 분노, 우울감에 빠지거나 자존감을 잃지 않고 스스로 마음을 달래는 노하우도 알려준다. 만약 어떤 고객이 과도한 요구를 하거나 큰 소리를 질러 업무를 방해한다면, 당황하거나 놀라지 말고 '고객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과도한 행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직업인으로서 그를 대하고 내 마음에 자발적 상처를 내지 않는다'고 속으로 다짐하는 등의 방법을 권하고 있다.

그렇다면 갑질은 인간의 본성일까. 강자는 약자를 거리낌 없이 지배하고, 약자는 강자를 군말 없이 따르게끔 우리의 마음이 진화했을까.

전중환 교수(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가 신작 '본성이 답이다'를 펴냈는데, 우선 이 책의 갑질의 심리학'을 보면 오너 가족인 대형 항공사 전 부사장이 승무원들에게 고함을 지르며 파일을 집어 던진다. 백화점에서 모녀가 주차장 아르바이트생의 무릎을 꿇린다.

◆"갑이 을을 짓밟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고?"

강자가 약자를 무자비하게 억압하고 착취하는 성향이 예외 없이 진화했으리라고 많은 사람이 믿는다. 인간의 원초적인 본성은 갑이 을을 짓밟는 독재주의이며, 인류의 오랜 진화 역사에서 극히 최근에 이르러서야 모두 다 평등한 민주주의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비로소 발명됐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정말로 갑질은 인간의 본성일까?'라고 의문을 던진다. "강자는 약자를 거리낌 없이 지배하고, 약자를 강자를 군말 없이 따르게끔 우리의 마음이 진화했을까"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그러나 그는 인류는 진화 역사의 대부분에 걸쳐 개인들 간에 재산이나 특권의 차이가 거의 없는 비교적 평등한 사회에서 살았다고 말한다. 남보다 뛰어난 기술이나 자질을 지닌 사람은 구성원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지도자로 인정됐다는 것이다. 즉 "지도자의 작은 권력은 오롯이 추종자들에게서 나왔다"는 얘기다.

그러다가 1만 년 전 농업이 시작, 남은 생산물이 쌓이고 사회가 커지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높은 사회적 지위가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자원과 성관계 기회를 약속하게 되면서 지도자가 추종자들을 착취하고 깔아뭉개는 일들이 빈번하게 벌어졌다"는 설명이다.

◆갑질이 아닌, 갑질에 대응하는 것이 '진화된 마음'

전 교수는 "창업주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고위직을 차지한 이는 상향식 리더십을 원하게끔 진화된 우리의 본성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며 "모든 아랫사람은 지나친 갑질에 분노, 행동에 나서게끔 진화된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강조한다.

갑질이 아닌, 갑질에 대응하는 것이 '진화된 마음'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우리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들로 이뤄졌지만, 그것이 곧 이기적인 본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전쟁과 살인, 대립과 갈등, 아동이나 여성과 같은 약자를 향한 폭력 등 우리 사회에서 나날이 불거지고 있는 갖은 사회악들이 도대체 왜 일어나는지, 인간 본성을 근거로 한 인과적 설명이 먼저 이뤄진다면 사회악을 보다 효과적으로 줄이는 해결 방안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한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