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가 거부한 것은 무엇인가. 낙원인가, 지옥인가. 잘라 말하기는 쉽지 않다. 기본소득 안은 현행 사회 시스템에 대한 고민이 담긴, 다소 과격한 정책 아이디어다. 지지자들은 돈이 많거나 적거나 등에 관계없이 사회구성원 전원에게 균등한 소득을 보장해야 진정한 자유와 평등이 가능해진다고 본다. 그러나 반대 진영은 정책 현실성과 지속 가능성을 문제시한다. 아무도 일하지 않는 기차가 어떤 종착역으로 향할지도 걱정한다. 자유와 평등의 기반이 송두리째 파괴되는 지상지옥을 경계하는 것이다.
이승현 논설위원 |
민주주의는 사회 갈등을 껴안는 정치 체제다. 거의 언제나 불편하고 비효율적이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도 말했다. “어느 누구도 민주주의가 완벽하거나 만능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고. 처칠은 이렇게 덧붙이기도 했다.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체제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여태까지 시도된 모든 다른 형태의 정치체제를 제외하곤 말이다.”
직접민주주의 색채가 짙은 스위스의 정치 체제도 완벽, 만능과 거리가 멀다. 간접민주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너무 자주 국민투표를 한다. 교육행정 관할권, 이슬람 첨탑 신축, 원전, 철도망 확충 등을 국민투표로 판가름할 정도다. 심지어 2012년에는 국민투표 횟수를 늘리겠다고 국민투표를 했다. 과다 비용이 수반된다. 단점이다. 그러나 장점도 크다. 이번만 해도 그렇다. 국가 분열과 갈등이 초래될 사안을 해결하는 직접민주주의 시스템의 멋진 작동이 그 얼마나 통쾌한가.
한국 사정은 어떤가. 산업화에 이어 민주화를 달성한 87년 체제 정립 이후 우리는 5년마다 대통령을, 4년마다 국회의원을 뽑으면서 국가과제 해결을 위임했다. 대의제가 건강하게 작동할 것으로 믿어온 셈이다. 결산서는 참담하다. 배가 산으로 가고 있다. 정치 염증과 냉소주의가 날로 번지는 이유다. 정치 리더십이 결여된 나라에서 대의제의 정상 작동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인지도 모른다.
우리도 국민투표를 한다. 대선·총선 등의 형식으로. 그러나 정책 선택권을 제대로 행사한 적은 없다. 헌법 제72조는 중요 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는 부의권을 대통령에게 줬지만 그 권한은 청와대 장롱에 들어 있을 뿐이다. 나라를 뒤흔들었던 세종시 문제만 해도 그렇다. 국민 의사는 뒷전에 둔 채로 당대·미래 권력 간의 진흙탕싸움으로 꼴사납게 흘러갔다. 지금도 국민 선택이 필수불가결한 과제가 수두룩하다. 신공항 입지, 노동개혁, 복지 방향과 재원 등의 사안이 두루 그렇다. 국운을 가를 중차대한 결정을 언제까지 부실 대의제에 내맡겨야만 하는지 모를 일이다.
일국의 제도는 진공 상태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역사적 토대 위에서 생성·변화한다. 스위스 정치 체제도 마찬가지다. 고대 아테네에서 미국으로 곧장 이어지는 것 같은 민주주의 연결선에는 중간 매듭이 있다. 16세기 알프스에서 피어난 ‘그라우뷘덴’ 민주주의다. 그들은 총투표 제도를 고안했다. 스위스의 체제는 뿌리가 깊은 것이다. 한국과 스위스는 인구 차이도 크다. 양국은 결코 같지 않다. 한국이 스위스 흉내를 내는 것이 쉬울 까닭이 없다. 그렇더라도 지상낙원 혹은 지상지옥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그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은 좀 이상한 것 아닐까. 우리에겐 그럴 권리를 행사할 길이 전혀 없는 것일까. 이게 정상인가. 기본소득 안의 부결 소식 앞에서 계속 물음표를 찍지 않을 수 없다.
이승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