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여름 독일군이 입성한 파리는 무방비도시였다.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치의 예술품 약탈에 맞서 활약한 두 남자가 있다. 루브르박물관 최고책임자인 자크 조자르와 나치 당원이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프란츠 볼프 메테르니히 백작이다.
‘프랑코포니아’는 적으로 만났지만 루브르의 예술품을 지키기 위해 협력자가 된 두 남자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프랑코포니아’는 나치의 예술품 약탈에 맞서 활약한 루브르박물관 자크 조자르 관장과 프란츠 볼프 메테르니히 백작의 이야기를 다큐판타지아 형식으로 풀어나간다. |
이쯤 되면 할리우드식 드라마를 기대했던 관객들은 난감해지면서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다. ‘이 영화를 끝까지 봐야 하는가, 뭐가 뭔지 이해도 안되는데···.’
하지만 어느 자리에서든 대화의 주도권 잡기를 좋아하는 당신이라면 반드시 챙겨 봐야 할 작품이다. 아는 게 많을수록 더 넓게 보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특히 루브르박물관에 다녀온 적이 있다면 보다 흥미진진하게 즐길 수 있다.
다큐멘터리와 판타지를 결합시킨 다큐판타지아 형식이다. 따라서 옛 다큐 필름과 흑백사진 위로 현대의 첨단 애니메이션이 교차한다. 수시로 1940년대와 현대를 오간다.
노아의 방주를 떠올리게 하는 배는 예술작품을 가득 싣고 거대한 폭풍 속에 갇혀 흔들린다. 국가와 박물관이라는 주제를 함축한 장면이다. 거친 파도는 전쟁을 의미하고 배는 박물관을 뜻한다. 죽음의 위기에 놓인 선장과 예술품들은 나치 침공 하의 루브르박물관 예술품들과 그것을 지키고자 고군분투했던 인물들을 상기시킨다.
여기까지 미리 알고 보면, 당신도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지적 유희’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러시아 출신의 거장 소쿠로프는 인간에 대해 탐구하고 객석을 향해 철학적 질문을 던지며 빼어난 미학을 창출해내는 감독이다. 영화 ‘파우스트’로 제68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그가 이번에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으로 눈을 돌렸다. 영화 속 내레이션을 담당하고 직접 출연하기도 한 그는 예술과 역사를 결코 분리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탁류 속에서 루브르를 지키고자 했던 두 사람과 박물관을 통해 권력과 예술의 관계, 역사가 예술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영화 속엔 정체불명의 두 인물이 등장한다. ‘나폴레옹’과 ‘마리안느’다. 나폴레옹은 원정에서 약탈한 전리품을 가져와 전시하면서 루브르가 세계적 박물관으로서의 모양을 갖추는 데 기여한 주인공이다. 나폴레옹의 유령이 자신의 수집품 곁을 떠나지 못하고 루브르를 맴도는 이유다. 마리안느는 들라크루아가 그린 명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속 인물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의 정신을 상징하는 여인이다. 두 인물은 각각 전쟁의 폭력성과 문화유산의 약탈 및 파괴, 그리고 자유·평등·박애를 나타낸다. 인류가 반복한 역사의 단면을 반영하며 과거와 현재, 미래 속에서 호흡한다.
루브르에 비해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박물관은 독일군에 의해 철저히 수탈당했다. 영화에선 짧게 등장하지만 에르미타주는 ‘박물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되뇌이게 한다. 예술의 가치와 역사가 담아내는 예술, 그것들이 살아 숨쉬는 박물관에 대한 깊은 사색의 길로 관객을 인도한다.
영화는 전란 속에서도 살아남은 예술품들과 인본주의적 가치는 시대를 초월하는 것임을 입증한다. 필사적인 노력 끝에 제자리를 찾아간 예술품들은 여전히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전하고 있다. 평범한 두 인물이 인류의 유산을 지켜내는 과정에서 보여준 인간의 신념과 용기 또한 루브르의 예술품들과 함께 오롯이 살아 있다.
프랑코포니아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역과 사람을 뜻한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작품들을 알고 보면 재미가 배가된다.
◆메두사호의 뗏목(테오도르 제리코, 1819년)
1816년 세네갈 해안에서 암초에 걸려 난파된 프랑스 군함 메두사호를 그렸다. 함장과 고위 관료들은 구명정을 타고 탈출했다. 하지만 신분이 낮은 149명은 배의 잔해로 임시 뗏목을 만들어 망망대해에서 보름을 버티다 14명만 살아남았다. 작가는 뗏목에서의 참혹한 죽음을 대형 화폭에 담았다. 인물들의 표정은 극한 상황에서의 절망과 처절함을 전한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외젠 들라크루아, 1830년)
프랑스혁명을 상징하는 명작. 왼손에 총을 들고 오른손으로 프랑스 국기를 치켜든 선두의 여인은 반쯤 벗겨진 드레스에 맨발을 한 ‘마리안느’. 해방된 노예를 상징하는 붉은색 보닛 모자를 쓴 마리안느는 투쟁의 정점에 선 강인하고 전투적인 모습으로 형상화했다.
◆사모트라케의 니케(승리의 여신, 작자 미상, 기원전 190년)
헬레니즘 조각의 정수. 뱃머리에 놓여 있던 날개 달린 여신의 생생한 모습은 금방이라도 물에 젖은 듯한 얇은 옷자락을 펄럭이며 바람을 가르고 승리를 향해 날아갈 것 같다. 1863년 에게해의 사모트라케섬에서 100여 점의 조각과 함께 발굴됐다.
◆알프스산맥을 건너는 보나파르트(폴 들라로슈, 1834년)
북이탈리아를 침공하기 위해 백마를 타고 힘차게 산맥을 오르는 그림은 궁정화가였던 자크 다비드가 나폴레옹의 지시로 그린 것이다. 실제 나폴레옹은 당나귀를 타고 현지인의 안내를 받으며 산맥을 넘었다. 나폴레옹을 미화한 당대의 예술을 조롱하기 위해 그의 사후 그려진 작품이다.
김신성 기자 sskim65@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