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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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 “건축은 인문학이다 … 채움보다 비움이 더 중요”

대한민국 대표 건축가 승효상
건축가 승효상(64)은 건축을 인문학이라고 했다. 건축설계는 남의 삶을 조직해주는 것이며, 남의 삶을 알기 위해서는 많은 문학작품과 영화 등을 보고 익혀야 한다고 했다.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역사를 배워야 하고, 어떻게 사는 게 옳은가를 알기 위해서는 철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 있는 건축사무소 이로재(履露齋)에서 승효상 대표를 만났다. 자택과 사무실을 겸한 5층 규모의 공간은 아담했다. 1층 개인 작업실의 커다란 책상에는 한번에 5권을 동시에 읽어야 직성이 풀린다는 독서습관을 입증하듯 책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책상 바로 옆에는 1만여 권의 책이 꽂혀 있는 서가가 있었다. 건축설계의 원동력이 왕성한 독서에서 나온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게 했다.

건축가 승효상은 “우리나라 아파트는 단지마다 담을 쳐서 통과할 수 없다”며 “마치 도시 속의 섬처럼 둥둥 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공동체가 연결이 안 된다. 담장을 없애면 사회공동체를 회복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상윤 기자
한쪽 귀퉁이에는 죽도(竹刀)가 한다발 놓여있었다. 망가진 것이지만 버릴 수 없어 그대로 둔 것이라고 한다. 검도 3단인 승 대표는 직원들과 함께 사옥 지하 도장에서 매일 오전 7시부터 1시간30분 동안 검도를 연마한다.

그는 “검도는 ‘페인트 모션’이 없어요. 정자세를 하고 바로 들어가야 합니다. 단도직입인 거죠. 곧바로 본질에 들어가는 것이 제 성격과 딱 맞아 매일 운동을 합니다”라며 검도 예찬을 했다.

책상 뒤쪽에는 ‘이로재’라고 쓰인 200여 년 된 현판이 놓여 있었다. ‘이슬을 밟는 집’이라는 뜻이 너무 시적이어서 건축사무소 이름으로 쓰고 있다고 했다.

이로재 현판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교수로부터 받은 것이다. 승 대표가 1992년 유 교수의 집인 수졸당을 설계했을 때 유 교수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 전이었다. 건축비가 넉넉지 못한 유 교수가 설계비를 제대로 주지 못한 마음을 현판으로 대신한 것이다.

“이로재는 유교경전인 ‘예기’에 나오는 것으로, 가난한 선비가 연로한 부친을 모시고 살면서 이른 아침마다 이슬을 밟으며 문안을 갔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됐습니다. 효성 지극한 선비가 사는 집이 검박하고 단순하지 않겠습니까. 이로재에 담긴 의미가 제가 추구하는 건축과 같아서 사무실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승 대표는 부산의 피란민촌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북한에서 월남한 부친은 부산에 교회를 세울 정도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승 대표는 교회 마당을 놀이터 삼아 유년시절을 보냈다.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려 했지만 집안의 반대가 심했고, 믿고 따르는 누나의 권유로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1971학번인 그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유신독재가 정점에 달했던 터라 정상적인 수업은 거의 불가능했다. 고향을 떠나 혼자 대학 생활을 하던 승 대표는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거리에 나간 날이 많았다. 하지만 승 대표는 데모대에 있던 어느 날 한 선배가 다가와 “너는 더 이상 데모하지 말고 건축 공부에 매진하라”고 한 얘기를 거역할 수 없어 건축에 빠졌다. 승 대표는 지금도 왜 그 선배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는 교수의 권유로 당시 최고 건축가로 이름을 떨치던 김수근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제대로 된 건축을 배우기 시작했다. 김수근은 승 대표에게 실질적인 스승이었다. 암울했던 시대 승 대표를 지탱하게 해준 것은 건축이었다.

바깥 사회와는 담을 쌓고 김수근이 이끄는 공간연구소의 사옥 안에서 먹고 자며 오직 건축에만 매진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건축이었다. 김수근이 건축도면 10장을 그리라고 하면 다음 날 아침 20장을 갖고 가 “내가 그린 것이 더 좋지 않느냐”고 대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판판이 깨지는 처절한 패배였다. 그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한 단계 성장했다.

그는 김수근 이전의 국내 건축은 예술의 일부로 취급됐다고 했다. 건축을 모양과 외형만 보는 큰 조각처럼 인식했다는 것이다. 건축의 본질은 내부 공간을 만들기 위한 것인데, 이 부분이 도외시됐다고 했다. 김수근이 건축사무소 이름을 ‘공간연구소’로 지으면서 건축에 있어서 공간의 중요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남산에 짓기로 했던 국회의사당 공모에 1등으로 당선되면서 금의환향한 김수근은 혁명정부의 일을 도맡다시피 했다. 하지만 김수근도 한번 크게 좌절한 사건이 있었다. 일본에서 공부한 김수근이 국립부여박물관을 설계했는데 왜색 논란에 휩싸인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수근은 한국전통과 한국건축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서양과 일본 건축을 직수입했지만 왜색 논란을 기점으로 한국 공간의 특징을 연구했다. 이후 김수근 건축의 전성기가 시작됐다. 승 대표도 이때 김수근 건축의 5대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마산성당과 경동교회, 청주박물관 등의 건축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김수근이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승 대표는 새로운 건축인생을 시작한다. 승 대표는 1989년 건축사무소를 차려 독립했다. 이때 빈자의 미학을 통해 ‘승효상 건축’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승 대표는 자신이 지켜야 할 건축윤리로서 빈자의 미학을 쓴다고 했다. 가난한 자를 위한 미학이 아니고 가난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미학, 가난할 줄 아는 사람의 삶의 방식이 빈자의 미학이라고 했다.

달동네를 가면 주민들이 가진 것이 없어도 많은 것을 나눠 갖고 산다. 스스로 공간을 만들고 나눈다. 하지만 잘사는 동네는 담장은 높고 사람 대신 자동차만 다닌다. 붙어 사는 것이지 모여 사는 것은 아니다.

승효상은 절판된 책인 ‘빈자의 미학’에서 ‘가짐보다 쓰임이 더 중요하고, 더함보다는 나눔이 더 중요하며, 채움보다는 비움이 더욱 중요하다’고 했다. 그의 건축윤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표현이다. 그는 한국건축을 상징하는 공간사옥이 상업화랑에 넘어간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공간사옥이 매물로 나오자 공공 인수의 당위성을 설명하며 서울시와 문화체육관광부를 상대로 협의를 벌였지만 공간사옥 소유자가 요구하는 금액을 제때 맞추지 못해 매각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1971년 지어진 공간사옥은 건축 관련 전문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 하면 항상 가장 좋은 현대건축물 1위에 꼽힙니다. 워낙 잘 만들어졌기 때문에 안에 들어가보면 한국 건축, 공간의 느낌이 그대로 들어옵니다. 크기는 물론이거니와 공간의 연결방법, 공간의 높낮이 조절이 아주 편안하죠. 서양 건축가나 평론가도 공간사옥을 보면서 깜짝깜짝 놀랍니다.이런 사옥을 건축박물관이나 김수근기념관으로 사용해야 하는데 개인 소유가 돼 안타깝습니다.”

승 대표는 삶의 실체를 그려야 하는 건축가에게 여행은 가장 유효한 공부 방법이라고 했다. 건축은 땅을 딛고 서 있기 때문에 땅을 보지 않고는 건축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건축물이 들어서는 주변을 모르면 환상에 불과하다.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여행을 통해 현장을 가봐야 한다. 그는 설계를 의뢰받을 경우 현장에 나가 땅을 보기 전까지는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땅을 보면 설계가 자연스럽게 풀린다고 했다. 그는 건축을 하는 한 여행길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승 대표는 한국의 건축을 이해하려면 서울 종묘를 방문해 보라고 권했다. 서울 한복판에 23만1400여㎡ 크기의 시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고 했다. 서울풍경은 그리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니지만 그 한가운데 침묵의 공간인 종묘가 있어 서울이 지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종묘의 건축양식과 장소는 한국이 갖고 있는 공간의 원형질이라고 했다. 승 대표는 일이 잘 풀리지 않고 답답할 때 종묘에 가면 많은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다고 전했다. 그는 외국인에게 우리 건축의 특징을 보여주고 싶을 때는 하회마을 근처에 있는 병산서원을 찾는다. 한번은 뉴욕 현대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인 베리 버그돌을 병산서원에 데리고 가 아무 얘기 없이 마당에 있게 했더니 그가 감동을 했던지 “승효상 건축의 출발이 이곳이군요”라고 했다고 전할 만큼 우수하다고 했다.

승 대표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건축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은 상당히 희망적이라고 했다. 좋아하는 건축가 이름을 술술 대는 경우도 생기고 있을 정도라고 했다. 승 대표는 원하는 건축을 위해서는 건축가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 건축주가 개인의 습관과 라이프 스타일, 심지어 비밀까지 털어놓은 뒤 최종 판단은 건축가의 전문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서울시 총괄건축가를 맡고 있으며, 임기는 오는 9월까지다. 재임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1초도 더 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박원순 시장이 서운해해도 총괄건축가를 개인이 아닌 시스템으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진작부터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총괄건축가를 맡은 후 적들이 많이 생겼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일하는 증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개인의 이익을 챙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뒷말을 할 수 있지만 건축은 원래 공공적 가치에 목적을 두는 것이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건축주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충돌할때 사회를 선택해야 제대로 된 건축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총괄건축가를 하는 동안 공공적 가치에 많은 시간을 투여했으며,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건축이 곧바로 결과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서울역 고가공원과 세운상가 재생사업은 내년 초쯤 현실화한다.

서울역 고가공원화 사업은 단순히 뉴욕의 하이라인을 벤치마킹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서울역에 가 보세요.직선거리 200m도 안되는 남산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타야 합니다. 서울역 주변시설이 파편화돼 있습니다. 서울역 고가공원화 사업은 흩어져 있는 도시시설을 하나로 묶어 네트워킹화해 보행도시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는 광화문광장에 대한 조언도 빼놓지 않았다. 광화문광장은 광장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했다. 광장은 일상적인 공간, 즉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지만 현재는 위험을 무릅쓰고 건너야 해 재구조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세종문화회관 쪽 차로를 폐쇄해 합쳐야 하고, 파낸 은행나무를 다시 옮겨 심어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승효상은 건축가는 성직자보다 더 성직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선을 하나 잘못 그으면 사는 방법이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함부로 설계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그래서 마감이 임박해서야 작업할 수 있으며, 이 때문에 습관처럼 밤을 새운다고 했다. 인터뷰를 끝낼 때까지 승효상은 ‘빈자의 미학’을 추구하는 ‘사색의 건축가’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승효상(64)은


△1952년 부산 출생 △서울대 건축학과·동대학원 졸 △김수근 공간건축연구소 △건축사무소 이로재 대표 △파주출판도시 코디네이터 △2011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총감독 △서울시 총괄건축가 △저서 빈작의 미학, 건축 사유의 기호, 지문,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등 △대표작 수졸당, 동숭동 쇳대박물관, DMZ평화생명동산 등


박연직 선임기자 repo21@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