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겐 드레버만 지음/김태희 옮김/교양인/2만8000원 |
독일의 화가 케테 콜비츠의 1926년 작 ‘빵을!’이라는 그림을 보자. 엄마를 바라보는 간절한 눈빛, 치마자락을 부여잡은 손에서 굶주린 아이의 처절함이 가득하다. 얼굴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뒷모습만으로도 엄마의 절망은 선연하다.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력함이 뚜렷하다.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도 비슷한 상황에 놓인 엄마가 있다. 큰 흉년이 들어 당장 하루 먹을 빵도 마련할 길이 없다.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비정한’ 엄마는 아이들을 숲 속에 버리기로 결심한다. 버려진 아이들은 죽을 것이고 엄마는 “아이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의 화가 케테 콜비츠의 1926년 작 ‘빵을!’이다. 굶주린 아이의 처절함과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없는 엄마의 무력감이 선명하다.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도 비슷한 상황에 놓인 엄마가 등장한다. 교양인 제공 |
엄마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식을 미워하는 게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새엄마’가 아니라 ‘친엄마’다. 각색되기 전의 ‘헨젤과 그레텔’에서는 친엄마로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
“어쩌면 정말 아이들을 죽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서 ‘벗어나려는’ 것은 아닐까?”
가난 때문에 사랑하는 자식마저 벗어나고 싶은 짐이 되어 버린 현실에 직면한 부모는 지금도 많다.
남매는 엄마의 계획, 그리고 그 계획을 유발한 끔찍한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버려질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사라지는 게 해결책이 아닐까. 그런데 헨젤과 그레텔은 집요하게 자신들을 거부한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여기서 저자는 자신의 심리상담 경험을 들려준다.
“많은 사람이 아무리 거부당하고 실망하고 심지어 질책까지 받더라도 끈질기게, 얼핏 보기에 막무가내일 정도로 도움과 이해와 애정을 갈구한다. 그것도 하필이면 그들이 바라는 것을 애당초 얻을 수 없는 곳에서 말이다.”
아이들이 부모를 떠나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해법은 부모와 자식 간의 깊은 애정, 유대감 때문에 허락되지 않는다. 양쪽의 유대감은 유대감을 그냥 무책임하게 끝장내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동화는 헨젤과 그레텔이 숲속 과자집에서 만난 마녀를 죽이는 사건으로 이어지며 절정을 맞는다. 마녀 살해의 당사자가 그레텔이라는 점이 포인트다. 마녀는 끝끝내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악한 엄마의 상징이다. 따라서 심리학적 관점에서 마녀의 죽음은 엄마에 대한 중독 같은 집착에서 벗어나 자기 삶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마련되었음을 뜻한다.
마녀를 죽이는 사람이 착한 동생이자 두려움에 울먹이며 마녀에게 착취당하는 아이였던 그레텔일까. 저자는 헨젤의 내면에 존재하는 약한 감정이 그레텔로 형상화된 것이라고 한다. 헨젤과 그레텔은 두 명이 아니라 한 명의 소년인 것이다. 그래서 마녀는 그레텔의 손에 죽음을 맞아야 한다.
저자는 “(마녀의 죽음은) 불안을 주는 콤플렉스가 자취를 감추고, 불안을 일으키는 사람이 이제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이제 헨젤은 성장했고, 유년의 시련은 진주와 보석을 가득 들고 집에 돌아오는 것으로 보상된다. 저자는 “시원적인 형태와 그 본질을 그려내고 있는” 동화를 소재로 인간 심리를 설명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이 책에서는 남성의 성장 과정을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헨젤과 그레텔’ 외에 남자 주인공이 시련을 넘어 행복을 찾는 ‘두 형제’, ‘수정 구슬’, ‘북 치는 소년’ 4편을 소개한다. 모두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된 인격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관점이다.
각각의 동화에서 남성의 심리를 읽을 수 있는 다양한 요소를 파헤친다. 가령 순결한 처녀를 바치라고 요구하는 ‘두 형제’의 용은 명확하게 아버지라는 인물의 ‘분열’을 상징한다. 아버지는 딸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자기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모두 없애버릴 것이라고 을러대는 존재다. 그래서 수많은 남자들이 처녀를 구하려다 죽음을 맞는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