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을 ‘모범생과 문제아’로 분류하는 틀 속에서 ‘모범생’이었던 나는 ‘문제아’에 상대적으로 가까운 친구들이 보여주는 창의를 몰래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모범생’은 작품보다 해설에 더 집중해야 했다. 정답을 찾지 못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작품 자체에 집중한 건 20대 이후 내 필요에 의해서였다. 스스로가 아닌 교과서의 요구대로 느꼈다는 생각을 그때서야 했다. 우리는 수학 문제 하나를 풀어도 새로운 방식보다 해답을 착실하게 따라가길 요구받았다.
홍주형 정치부 기자 |
여러 정의가 있겠지만, 나는 창의가 자아와 낯선 외부환경 사이의 균열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백남준이 없었으면 플럭서스가 없었을 것이고, 플럭서스가 없었으면 백남준이 없었을 것’이라고들 한다. 백남준과 플럭서스는 다른 문화에 속하지만 기꺼이 맞부딪혀 서로의 창의를 키웠다. 창의적이지 않은 예술이 모방일 뿐이듯 익숙함을 벗지 못하는 사람과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우리 문화정책이 문화예술분야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창의가 물같이 흐르게 하는 것이 돼야 하는 이유다.
백남준처럼 스스로 돌출한 거장 혹은 브랜드에 열광할 게 아니고 여러 백남준을 낳고 품을 수 있는 사회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정책결정자에게 기대하는 것은 창의가 가져올 수 있는 변화를 인식하고, 창의를 확장하며 저항을 줄여나가는 사회 인프라를 만드는 혜안이다.
작가로서 백남준의 마지막 시간을 지켜본 한 큐레이터는 그 눈의 순수함을 얘기했다. 마지막까지 아이의 눈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는 죽는 날까지 창의적이었다. 아이의 눈을 너무 일찍 빼앗지 않도록, 혹은 나이가 들어서도 아이의 눈을 잃지 않을 수 있도록 크리에이티브 코리아는 그 눈을 존중하고 키워주는 사회를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홍주형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