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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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곧 그림”… 조선 최고의 문인화가 이인상 문학세계 오롯이

서울대 박희병 교수 16년간 ‘능호집(상·하)’ 완역 출간
정선과 심사정, 김홍도. 18세기 조선 화단을 주름잡았고 지금도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이들 사이에 능호관 이인상(1710∼1760)은 한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는 당대의 이름난 화가였고, 훗날 추사 김정희가 높은 경지를 인정한 유일한 선배였다. 그러나 정선 등과 그림의 결은 달랐다. 이인상은 화가인 동시에 시인이자 산문가였다. 그런 이유로 그림에는 선비로서의 정신과 이념, 이른바 ‘문기’(文氣)가 누구의 것보다 또렷했다. ‘예술가 이인상’을 온전히 파악하려면 그림뿐만 아니라 문학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울대 국문학과 박희병 교수는 화가가 아닌 문인 이인상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고 판단했고 문집인 ‘능호집’(상·하, 돌베개) 완역에 나섰다. 박 교수는 “이인상에게 문학과 예술은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그런 관계를 이룬다”며 “그러나 지금까지 그의 글을 섬세하게 읽은 사람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16년간 번역에 공을 들여 최근 출간된 책에 그간 잘 몰랐던, 혹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인상의 면모가 드러난다. 

◆글은 곧 그림이었다

바위를 뚫고 나온 듯 곧게 자란 소나무, 눈을 맞아 희뿌옇지만 굳센 모습에서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논어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시련에도 꺾이지 않는 의연함을 보여주는 소나무 그림, 이인상의 ‘설송도’다. 능호집에 실린 ‘금산기’라는 글에는 이 그림을 묘사한 듯한 문장이 있다.

“비탈길을 조금 가니 산 전체가 온통 장송(長松)인데…바람을 머금어 우레와 같은 소리를 냈으므로 정신이 오싹했다.…소나무는 높은 것일수록 짙은 서리를 받아 그 희뿌옇고 푸른 모습이 가히 볼 만했다.”

박 교수는 “이인상의 글에서 주목되는 것은 바위나 나무에 대한 비범한 눈이다. 산수화에서도 바위와 나무를 자기 식으로 표현해 자신의 심회를 부쳤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이인상이 추구한 미학의 정수를 ‘은미’라는 단어로 집약할 수 있다고 했다. ‘아름다움의 절제’ 혹은 ‘은근한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이것은 삶과 문학, 예술을 관통하는 핵심 원리였다. 시나 산문에 현란한 수식어가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은 이런 원칙의 반영이다. 박 교수는 “이런 생각은 글쓰기에서만이 아니라 그림 그리기와 글씨 쓰기에서도 똑같이 관철된다”고 강조했다. 

18세기 최고의 문인화가로 꼽히는 이인상의 초상화.
돌베개 제공
이인상의 ‘설송도’. 눈의 맞은 소나무의 꼿꼿한 모습에서 어떤 시련에도 꺾이지 않는 의연함을 추구했던 이인상의 정신세계를 읽을 수 있다.
돌베개 제공
◆“서얼이지만 사대부였기 때문에 문제적인 작가”

이인상은 ‘반쪽짜리 양반’ 서얼이었다. 신분은 불안했고, 입신양명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인상과 같은 처지의 서얼 문인들에게는 ‘공통적인 표징’이 확인된다. 박 교수가 ‘불우의 존재감’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런 정서적 태도 내지 상태는 사대부적 문제의식의 적극적 발양을 제약하거나 위축시켰다.

이인상은 달랐다. 자신이 받는 신분적 차별을 토로하거나 그에 대한 정서적 태도를 표출하는 글이 없지는 않지만 시대의 문제나 국가의 문제에 골몰하며 ‘사대부적 자아’를 두드러지게 드러냈다. 스스로 ‘천하의 선비’임을 자부하는 글도 눈에 띈다.

어떻게 이런 태도가 가능했을까. 박 교수는 교우관계에서 답을 찾는다. 이인상의 벗들은 대개 명문가 출신의 사대부들이었다. 그들은 이인상을 서얼로 대하지 않았고 높은 선비로 존중했다. 박 교수가 보기에 후배 세대인 북학파에서 사대부인 박지원, 홍대용, 정철조와 서얼인 이덕무, 박제가의 관계가 수평적이지 않았던 것과 대비되는 면모다.

박 교수는 “기존의 연구에서 서얼 문인의 글에는 서얼의 감정과 처지가 투사되어 있다고 기계적으로 해석했고, 이인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며 “이런 한계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이인상은 독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