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대한민국 길을 묻다] 툭하면 인재… 하청노동자 죽음에 내몰린다

구의역서 스크린도어 수리공 사망/ 시간·실적압박 쫓겨 안전수칙 외면/‘위험의 외주화’ 사회문제로 대두
‘노동자를 사람으로 봤다면 일어나지 않을 죽음이었습니다. 더 이상 죽이지 말아주세요.’ 지난 5월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김모(19)군이 열차에 치여 사망하자 한 시민이 쓴 추모글이다. 김군의 안타까운 죽음이 알려지면서 구의역에는 이 같은 추모글이 담긴 포스트잇이 수천장 붙었다. 많은 이들이 김군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것은 사건이 단순한 불의의 사고가 아닌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 ‘인재(人災)’였기 때문이다. 김군의 가방에서 나온 컵라면은 열악한 근로환경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스크린도어 수리는 ‘2인1조’로 해야 한다는 매뉴얼이 있지만 시간에 쫓기던 현장에서는 지켜지지 못했다.

5명의 직원이 1∼4호선 모든 역을 담당했으며 사고 발생 1시간 안에 현장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하철 2호선에서 사망한 스크린도어 수리공이 김군을 포함해 3년간 3명에 달한다는 점도 이 사고가 인재라는 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16일 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2008∼2013년 한국의 산업재해 사망률은 근로자 10만명당 8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터키(15명)와 멕시코(10명) 다음으로 많았다. 연간 산재 발생건수는 9만여건에 이른다.

최근 10년간 소폭 오름과 내림세를 반복했지만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에만 1810명이 사망했다. 하루에 5명이 산재로 숨지고 있는 것이다.

클릭하면 큰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위험에 내몰리는 하청노동자

김군의 죽음 이후 한달이 채 안 돼 발생한 에어컨 수리기사 사망 사고는 김군의 죽음과 판박이처럼 닮아 있다.

삼성전자 서비스센터 협력업체 직원 진모(44)씨는 지난 6월23일 서울 노원구 월계동의 한 빌라 3층 외벽에 설치된 에어컨 실외기를 수리하다 추락해 숨졌다. 외벽에 붙은 실외기 수리 시 사다리차를 부르거나 안전띠를 설치하고 작업해야 하지만 진씨의 동료들은 안전수칙을 지킬 수 없는 구조라고 입을 모았다. 사다리차를 부르면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 데다가 20분 만에 제품을 수리해야 하는 압박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김군과 진씨의 공통점은 둘다 하청노동자라는 것이다.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근무하는 하청노동자들은 시간과 실적 압박에 쫓겨 안전수칙을 지킬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지하철 스크린도어 근로자 사고의 경우 2호선과 달리 정규직 근로자들이 근무하는 5∼8호선에서는 한번도 사고가 나지 않았다. 원청기업들은 하청노동자들의 안전관리에는 책임이 없다며 회피하는 가운데 위험업무를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도맡는 ‘위험의 외주화’가 되고 있는 것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하청노동자 비율은 2012년 37.7%에서 2013년 38.4%, 2014년 38.6%, 2015년 상반기 40.2%로 늘고 있다. 지난해 300명 이상 사업장에서 산재사고로 숨진 근로자 855명 중 40.4%(345명)는 하청업체 노동자였다. 하청업체 노동자 비율이 통상 20%가량 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매우 높은 수치다.

김군의 사망 이후 서울시는 스크린도어 광고판을 철거하고 선로 쪽이 아닌 승강장 쪽에서도 수리가 가능한 레이저센서로 교체한다는 등의 대책을 밝혔다. 하지만 하청노동자에 대한 안전 관리가 없다면 근본적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하청노동자의 산재 사고 발생 시 원청기업에 책임을 묻는 구조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 반영 못하는 통계

숨겨진 산재가 많다는 점도 문제다.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산재 사망자 비율이 최고 수준이면서도 산재 발생률은 낮은 기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만큼 은폐된 사고가 많다는 의미다. 실제 현대건설은 한국수력원자력의 발주로 시공 중인 원자력발전 공사 현장에서 3년간 97건의 산재를 은폐한 사실이 적발돼 최근 고용부가 과태료 2억9100만원을 부과했다. 2011∼2013년 적발된 산업재해 미보고 건수는 2700건에 달한다. 정부 용역 보고서는 실제 산재가 신고된 건수의 최소 12배, 최대 24배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업들이 산재를 숨기는 것은 신고할수록 불리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고용부는 매년 산재율이 현저히 높거나 중대 사고가 발생한 사업장을 홈페이지에 공표한다. 해당 사업장은 2년간 정부포상이 제한되고 다음해 산업안전보건 감독 대상에 포함되는 등 각종 공사 계약에서 불이익을 받게 된다.

한 건설현장 노동자는 “하청 노동자들은 더더욱 눈치가 보여 산재 신청을 못한다”며 “다쳐도 회사에 말하지 못하거나 회사로부터 약간의 치료비만 받고 넘어가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말했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2014년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를 조사한 결과 근로자 403명 중 최근 3년간 작업 중 사고로 치료 받은 사람은 77명이었으나 이중 산재 처리는 3.7%에 불과했다.

산재를 쉬쉬하는 현실은 노동자들을 또 다른 위험으로 내몬다. 지난해 7월 충북 청주의 한 화장품업체 공장에서는 근로자 A씨가 지게차에 치는 사고가 발생해 119 구급차가 도착했으나 현장책임자가 구급차를 돌려보냈다. 사고를 은폐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회사는 A씨를 따로 회사 지정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 과정에서 병원 이송이 한 시간가량 지연되면서 A씨는 결국 숨을 거뒀다.

고용부는 최근 반복적 산재 은폐 행위에 대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 부과 등 형사처벌이 가능하도록 하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그러나 더욱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입찰참가자격사전심사제도의 산재 관련 가산점 제도를 폐지하고 산재 은폐 적발을 강화하기 위해 응급기록이나 진료기록을 활용할 수 있도록 법령 근거를 마련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유나 기자 yo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