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이 이념이나 노선이 아니라 특정 지도자와의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찾는 이 코미디는 비단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일단 한국에서는 정파나 정당 지도자가 정치인의 생살여탈권인 공천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친박과 같은 족보가 등장한다. 그렇지만 친박, 비박과 같은 족보는 유권자나 당원이 예비 선거를 통해 후보를 뽑는 미국 선거판에서도 등장했다. 막말과 포퓰리스트 공약으로 돌풍을 일으켜 미 공화당의 대선 후보 자리를 꿰찬 도널드 트럼프 때문이다.
국기연 워싱턴 특파원 |
제프 세션스 상원의원(앨라배마)은 미국 정치권에서 존재감이 별로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상원의원 중에서 처음으로 트럼프 지지를 선언해 ‘친트럼프’의 좌장으로 군림하고 있다. 정치를 안 했으면 안 했지 트럼프와 함께할 수는 없다는 ‘비트럼프’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수전 콜린스(메인), 린지 그레이엄(사우스캐롤라이나), 마크 커크(일리노이), 벤 사스(네브래스카) 상원의원과 밥 돌(일리노이), 일레나 로스-레티넌(플로리다) 하원의원 등이 꼽힌다.
공화당 정치 지도자로서 ‘비트럼프’가 될 수는 없어 ‘가짜 친트럼프’로 행세하는 그룹이 있다. 공화당 1인자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 트럼프와 경합했던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친트럼프’와 ‘비트럼프’의 양다리를 걸친 ‘친&비트럼프’도 있다. 이들은 흔히 “트럼프에 투표하겠지만 그를 공식 지지(endorse)하지는 않겠다”고 말한다. 트럼프와 경합했던 테드 크루즈(텍사스), 켈리 아요트(뉴햄프셔) 상원의원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친트럼프’와 ‘비트럼프’ 사이에서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고, 끝까지 버티겠다는 ‘무트럼프’도 부지기수이다. 프레드 톰슨(미시건), 마이크 코프만(콜로라도), 데이브 라이커트(워싱턴) 하원의원 등은 “트럼프를 지지하지도, 반대하지도 않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와 동시에 상·하 의원, 주지사 등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실시한다. 선거구별로 한 개의 투표 용지나 컴퓨터 스크린에서 각종 선거 출마자의 지지 여부를 하나씩 골라야 하는 일렬 투표가 진행된다. 이 때문에 투표 용지 맨 위에 올라가 있는 대선 후보가 상· 하 의원 선거 출마자 등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유권자가 특정 정당 후보에 ‘내리닫이 투표’를 하느냐, 아니면 각 선거의 후보별로 ‘지그재그’ 투표를 하느냐에 따라 각종 선거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
한국의 4·13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친박, 진박, 가박 등 ‘박타령’을 하다가 참패했다. 미국 공화당도 ‘친트럼프’, ‘비트럼프’ 등으로 갈리는 것을 보면 11·8 선거에서 쓴맛을 볼 것 같다. 한국이나 미국의 유권자 한 사람은 우매할 수 있으나 전체 집단으로서 유권자는 언제나 현명한 선택을 한다.
국기연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