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 손정춘 할매가 ‘나의 소원 한글’에서 “나의 소원 한글 공부/십일 사건 때 일학년/몸이 아파서 중퇴하고// 손자 대학 가고/한글 공부 배우네…쓰는 것은 어려워도/한글을 익을 수 있어/행복하다”라고 하거나, ‘시가 뭐고’에서 “논에 들어/할 일도 많은데/고우 시간이라고/일도 놓고 /헛둥지둥 왔는데/시를 쓰라 하네/시가 뭐고/나는 지금 시금치씨/배추씨만 아는데”라고 간명하게 노래하고 있는 것은 시가 실생활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웅변적인 증언이다. 특히 위의 인용이 시가 되는 것은 ‘시금치씨·배추씨’에서 보듯 ‘씨’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시가 응축되면 씨가 되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인데 시골농사와 이를 결합시켜 생각하니 마치 시의 근원을 깨우쳐 주는 것 같다.
최동호 경남대 석좌교수·시인 |
김영숙 할매가 ‘시, 잠자는 나를 꺼내다’에서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었구나/꺼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까/못나고 아픈 것도 있는데/예쁜 것만 찾아 놓을까//그래도 마음속에 한 줄기/빛을 비추고 싶다/다 괜찮다고 모든 게/어우러지면 완숙되는 거라고/나를 꺼내 하늘로 날려 보낸다”고 쓴 것은 정말 제대로의 시의 길을 찾아 자유를 얻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 할매의 마음속에 비추는 한 줄기의 빛이 바로 시를 통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비밀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할매들의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지난 세월의 역사가 시 속에 녹아들어 있다는 점이다. 취학통지서를 받고도 공부하지 못한 한을 비롯해 여섯 살 전후에 맞이한 6·25나 월남파병, 그리고 남파공비 김신조 사건 등이 이들의 기억 속에 발효돼 시로 나타나고 있다.
시가 체험과 기억의 산물이라는 것은 이미 여러 학자들이 말한 바 있지만 이렇게 생생한 체험을 통해 입증된다는 것이 흥미롭다. 중국 당나라의 대시인 백낙천은 자신이 쓴 시를 동네 노파에게 보여주고 이 노파가 좋다고 하면 발표했다 한다. 아직 미숙한 작품을 걸러내는 지혜로운 조언자가 바로 인생의 경험이 풍부한 노파이기 때문이다. 문단의 주변에서 혼란과 분열의 난맥상을 경험하고 있는 필자의 답답한 마음을 노년에 한글을 깨친 할매들의 시가 어느 정도 해소시켜 주었다는 것은 생소한 일이기도 하고 아름다운 일이기도 하다. 오히려 전망부재의 혼란을 보여주는 한국시의 희망을 이들의 진솔한 시편에서 찾아야 한다면 그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체험 없는 진실의 과다한 수사를 반성할 때 우리 시의 미래가 열린다는 사실의 증언에 귀 기울여 본다면 보다 풍요로운 결실의 가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최동호 경남대 석좌교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