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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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옛 작품 덧칠하고 봉인하고… ‘말이 안 되는 미술’ 해보고 싶어”

한국현대미술 이끌어 온 김용익 작가
단색화와 민중미술, 공공미술, 대안공간 운동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미술인으로 활동해 온 김용익(69) 작가. 1970년대 중반 천 주름의 착시 효과를 활용한 ‘평면 오브제’로 화단에 입성했다. ‘앙데빵당’전, ‘에꼴 드 서울’전 등 당대의 유명 전시회에 초대되며 모더니즘 계열의 막내 세대로 활약하기 시작했고, 대학졸업도 전인 197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대학교 4학년 때 갑자기 떠버렸죠. 소위 출세를 했어요.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동료가 아닌 선배 교수님들을 제치고 나가게 된 거죠. 그 배경에는 박서보라는 어마어마한 분이 계셨지요.”

이후 그는 개인전을 두 번 하고 일본전시까지 했다. 한마디로 활발한 작품 활동의 장이 펼쳐진 것이다.


11월6일까지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지난 40년 동안의 작업을 보여주는 전시회를 갖는 김용익 작가. 그는 “이젠 시대의 무게를 내려놓고 경쾌하고 가벼운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당시 현대미술 붐이 일었지요. ‘현대미술’이라는 말이 많이 쓰였어요. 현대미술에 몸을 담으면서 개인적으로 들었던 생각은 주도세력 작가들이 모두 자기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쉽게 말해 계속 자기복제를 하고 그것이 강요되는 분위기였어요. 공모전에서도 새로운 작품을 가져가면 주최 측에서 원래 하던 것 가져오라는 식이었지요. 저는 그게 못마땅했어요.”

1970년대 정치상황도 그를 흔들리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몰두하던 현대미술의 매체 실험이 사회 현실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자문하기 시작했다. 실존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 것이다.

그는 1981년 돌연히 대표작 ‘평면 오브제’를 종이박스에 집어넣는다. 당대 모더니즘 미술에 단절을 선언한 것이다. 이는 동년배 작가들 대부분이 엄혹한 정치 상황에 항거해 민중미술을 표방하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 판지를 뚫거나 뒤집는 등 회화의 평면성을 재료로 삼는 작업에 몰두하며 시각예술의 순수한 형식 실험과 당대 현실에 대항하는 실천으로서의 미술 사이에서 고뇌했다. 그러면서 모더니스트로서 자신의 성향과 미술 작품의 현실적 효용이 만나는 지점을 구도하듯 찾아 헤맸다. 


김용익 작가의 1990년대 대표작 ‘무제’
“저의 이런 태도는 아마도 당시로서는 일종의 미학적인 자살행위, 미술정치판에서의 자살행위와 비슷한 거였지요.”

그는 민중미술에 호감을 가졌다. 시대적으로 합리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의 공통된 성향이기도 했다.

“전근대적이고 권위적인 화단 질서를 전복시키겠다는 점에서 민중미술에 친근감을 느꼈지요.”

어쩌면 그것은 그의 일방적인 민중미술에 대한 애정이었다. 민중미술 쪽에서 10여 년간 그를 받아들여주지 않은 점이 이를 말해준다. 후에 민중미술 작가들과 함께 작업을 하게 됐지만 민중미술 쪽으로 갔다고도 할 수 없다. 뒤집고 빼고 구멍을 내는 작업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어느 쪽이 앞면이고 뒷면인지 모르는 작업들이다. 여러 오브제를 갖다 붙이고 색을 칠해버리기도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애매성이나 이중성에서 오는 어떤 틈이라고나 할까요. 민족미술(민중미술)과 모더니즘 사이에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어떤 사이의 틈을 발견하고 싶었어요. 이쪽이 앞면인지 저쪽이 뒷면인지 잘 모르는 애매성을 추구한 것이 저만이 취할 수 있는 정치성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사실 그가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1970~90년대를 통과하면서 민족미술과 모더니즘 사이에서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는 1990년대 그의 전성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소위 ‘땡땡이 회화’ 시리즈를 선보인다. 캔버스 위에 원을 일정한 간격으로 나열한 작업으로 모더니즘 회화의 형식과 닮아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캔버스 구석에 작고 희미하게 적어놓은 글을 확인할 수 있다. 장기간 작품이 방치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염된 흔적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완전무결해 보이는 회화 작품에 균열을 내는 시도는 모더니즘 회화에 대한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멀리서 보면 심플한 회화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복잡한 디테일과 텍스트들을 볼 수 있어요. 텍스트의 중요한 내용은 ‘난 결코 과격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단지 체제 안에서 틈을 내려고 했어요. 과격해 보았자 예술 안에서의 게임이지요. 제아무리 예술 안에서 과격함을 주장하고 전복을 꿈꿔도 그것이 예술 안에서 언제나 재영토화, 재용납화, 재전복을 요구하는 쪽으로 나가게 마련입니다.”

그는 1990년대 후반부터 자신의 예전 작품을 검은색, 금색 물감으로 지워버리는 ‘절망의 완수’시리즈를 제작한다. 그는 수차례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을 지우고 남은 부분과 캔버스 뒷면에 또다시 글을 적었다. 그뿐만 아니라 작품 포장재나 전시실 벽면에서 떼어낸 시트지 등을 활용해 작품을 ‘포장’했다. 미술제도 자체를 환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즈음 그는 우울증에 시달린다.

“저는 모더니즘 병이라고 생각했죠. 제가 이해하는 모더니즘과 현실의 삶에 맞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계속 몸이 아팠어요. 모더니즘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자기폐쇄성이라고 할까요. 미술 안에서 미술이, 예술 안에서 예술이 논의되고 있는 자기폐쇄적 구조 이런 것들을 격동의 시대에 내면화하면서 사는 게 너무 힘들고 그래서 결국 병이 났어요. 그러면서 미술에 대한 혐오와 애증이 교차하면서 그동안 그렸던 그림을 전부 지우게 된 거죠.”

그렇다고 그가 모두를 확 지운 것은 아니다. 격자무늬로 만들어 지우고, 또 어느 한 부분은 남겨놓았다. 모더니스트의 예술게임을 끝내 버리지 못한 것이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라면 시커멓게 다 태워버렸어야 해요. 그런데 격자무늬로 지우고 남겨놓는 흔적들은 예술가로서의 게임의식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최근 그는 지난 최근 40년 남짓 진행해 온 작품 활동의 결과를 관 형태의 나무상자에 봉인하고 그 위에 고인의 명복을 비는 도상과 글을 덧붙이는 제의적 행위에 집중하고 있다. 그는 시신을 염하고 장례를 치르는 듯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그동안 많은 전환을 거쳐 온 작업 여정을 스스로 반성하고 정리한다. 그중에서도 종교화 형식의 ‘삼면화’가 눈길을 끈다. 타락, 죽음, 고통, 구원 등이 소재다. 망자들을 구원한다는 지장보살 그림엔 각종 텍스트가 쓰여 있다. 선천개벽 후천개벽도 나오고, 디스토피아 시대에는 새로운 창작이 불가능하고 오직 편집만이 가능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1년간 밖에 내놓아 썩은 100호짜리 땡땡이 그림에 금박을 입힌 작품도 있다.

“금박 땡땡이 그림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작품 위에 낙서를 했어요. 일부러 더럽힌 드로잉 작품을 보고 관객참여형 미술인가보다 생각한 거죠. 나중에 CCTV에 찍힌 모습을 보니깐 부모들이 옆에서 그걸 보면서 웃으며 사진을 찍어주더라구요. 미술관에서 깜짝 놀라서 저한테 전화했는데 ‘그 작품은 이제 완성됐네요’라고 했어요.”

그는 젊은 시절 작품을 남기는 것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중간에 버린 작품들도 많고. 게다가 썩혀 버린 것도 많다. 아쉬운 마음에 요즘 버렸던 작품을 다시 재제작하고 있다.

“신기하게도 내 안에서 갑자기 1970, 80년대 감성이 왈칵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 최근 석 달 사이에 70점을 만들었지요. 하루에 대작을 두세 점씩 하는 날도 있어요.”

봇물 터지듯 작품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스케치만 남겼던 것들을 확대 재생산 하는 방식이다.

“이제는‘말이 되는 미술’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편안하고 가볍게 살아도 이제는 누가 욕할 수 없는 나이가 됐지요.”

그는 앞으로 ‘말이 안 되는 미술’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가볍고 경쾌하지만 의미를 읽을 단서조차 주지 않는 작품들이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