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7월 만공(滿空·1871∼1946) 스님이 조선총독부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이 주재한 전국 31본산 주지회의에서 꾸짖은 말이다. 당시 주지회의에는 미나미 총독이 참석했다. 일제강점기 총독부가 조선불교를 식민지불교로 편입시켜,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시도를 경계하고 있던 만공 스님은 이런 사자후를 토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두고 만공 스님이 목숨을 내걸고 하는 ‘할’(喝·깨달음을 전하기 위해 지르는 소리)이었다고 평가했다.
대한불교조계종 덕숭총림 수덕사가 개최한 ‘일제하의 만공대선사 항일 사자후’ 학술대회를 마치고 수덕사 방장 설정 스님(가운데)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조계종 제공 |
만공은 1904년 스승 경허선사(鏡虛禪師·1849~1912)로부터 깨달음을 인가받고 만공이란 법호를 받는다. 만공과 만해 한용운은 당시 불교계에서도 널리 알려질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
당시 두 스님은 일제하에서 신음하던 조선불교의 선맥을 이어간 양대산맥으로 불렸다.
만공의 도움이 없었으면 만해의 독립운동도 활발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학술대회 발표자들은 증언했다. 생전의 만공을 보좌했던 수연(91) 스님은 “일례로 1937년 총독부 주지회의가 열렸던 날과 1941년 선학원 고승대회 당시 심야에 삼청공원의 은밀한 장소에서 한용운에게 자금을 전달한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고 말했다.
수덕사 경내에 보관 중인 만공 스님 영정. 조계종 제공 |
일제하 신여성 운동을 주도하다 28세 때 출가한 일엽(一葉·1896~1971·속세명 김원주) 스님도 만공이 아끼는 비구니였다. 우연히 들른 수덕사에서 만공의 법문을 듣고 발심한 것이다. 문하로 입문한 일엽에 대해 만공은 “그대가 지금 귀하다고 가진 무엇이라도 다 버려야 하고, 더구나 책을 읽고 보는 일이나 글 쓰고 구상하는 일은 아주 단념해야 한다”고 주의를 줬다. 일엽은 입적할 때까지 40여년간 만공의 가르침을 따라 수덕사에서 평생을 보낸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대망신을 당했던 미나미 총독은 만공을 구속하면 문제될 것으로 예상, 사건을 덮었다. 만공은 1942년 조국 광복 기원 1000일 기도를 수행했으며, 3일 만에 해방을 맞았다.
만공은 산천을 떠돌다 1905년 봄부터 덕숭산에 머물렀으며 수덕사 부근 토굴에서 입적할 때까지 40여년간 불교 선풍을 다시 일으키며 한국 불교를 이끌었다.
보조국사 지눌(知訥·1158∼1210)과 서산대사 휴정(休靜·1520∼1604), 경허(鏡虛·1846∼1912)의 선맥을 이은 만공은 동시대 인물인 용성(龍城·1864∼1940), 한암(漢岩·1876∼1951), 만해(萬海·1879~1944)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심응섭 순천향대 명예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이번 학술대회에는 김시명 순국선열 유족회장, 이덕진 문성대 교수, 김광식 동국대 교수, 하춘생 동국대 교수, 이동언 홍암나철선생선양회 연구실장 등의 발표가 이어졌다. 운상선원 주지 혜월 스님, 불교신문사 사장 주경 스님, 이정은 3·1운동 기념사업회장 등이 토론자로 나섰다.
이은윤 전 금강불교신문 사장은 ‘만공의 선사상과 항일독립정신’이란 발제문에서 “만공 선사의 항일 독립정신과 투쟁이 역사에 묻힌 채 아직까지 독립유공 서훈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은 참으로 딱한 일이며 후손들의 역사 인식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