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김제 금산사와 서울 영화사 등 3개 사찰의 조실(사찰의 어른)을 맡고 있는 송월주(사진) 스님이 자주 듣는 말이다. 스님은 올해 만 81세지만 60대로 보이는 동안의 면모를 하고 있다. 월주 스님은 26일 오후 금산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회고록 ‘토끼뿔 거북털’과 법문집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니다’의 출간 소감을 밝히면서 묵직한 메시지도 쏟아냈다.
“초등교 6년 때 교장 선생님께 간디의 얘기를 듣는 순간 매료되었고, 내 가슴에 자리 잡은 분입니다. 살아 오면서 그와 같은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확고히 갖게 되었지요. 지금의 사회운동, 복지운동, 평화운동, 인권운동에 관심을 가진 것도 그런 연유 때문일 게요.”
월주 스님의 사회활동은 대단했다.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과 함께 ‘종교 지도자 삼총사’로 불렸다. 1990년대 말부터 본격화했던 이들의 행보는 사회와 호흡하는 종교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었다. 당시 정치권은 국가의 큰일이 생길 때마다 이들을 초빙해 의견을 들었고, 국민들은 세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마실 물이 없어 흙탕물이나 허드렛물을 마시는 사람이 지금도 16억명이라면 믿겠어요?”
스님은 공부를 하고픈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학교도 몇 개 지어주었다. “물질을 약간 나누었을 뿐이지요. 내 것만 나눠준 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십시일반 정성을 모은 것을 심부름한 것뿐인데도 나는 세상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강과 행복을 받았으니 인과응보가 얼마나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겁니까?”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스님은 6·25전쟁 혼란기에 소년 시절을 보냈다. 죽고 죽이는 인간사회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불가에 귀의해 54년 법주사에서 사미계를, 56년 화엄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27세에 이미 전북지역 등 130여개 사찰을 관할하는 금산사 주지에 올랐다.
1980년 전두환·노태우 신군부는 불교계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이른바 ‘10·27법난 사태’다. 당시 스님은 총무원장이었다.
“전두환 장군을 대통령으로 지지해주길 바란다고 육군 중령이 나에게 세 번이나 요구했어요. 송월주 이름으로 어렵다면 조계종으로라도 해 달라고 하더군요. 세 번 모두 거부했지요. 즉시 그들은 이미 짜놓은 ‘45계획’을 실행에 옮겼어요. 간부 스님 153명이 죄다 신군부 조사실로 끌려갔지요. 비리 혐의자, 불량자 등 별별 명목의 죄목을 갖다붙여서….”
45계획이란 조계사가 있는 서울 종로구 견지동 45번지를 딴 것이다. 신군부는 당시 3만2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전국 사찰 5700여 곳을 짓밟았다.
스님은 “훗날 노태우정부 때 사과했지만…, 정부에서 보상받기로 한 게 1000억원 정도 될 건데, 기념관을 만들 생각”이라고 했다. 종교에 대한 쓴소리도 했다. “모든 종교는 치열하게 사회에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어요. 계속 반성하고 매일 참회하고, 사회의 향도자로 자비와 사랑을 실천해야 신뢰를 잃지 않지요. 한국불교는 기복에 젖어 있고 사찰 관리, 보수에 급급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산사에 앉아 수행만 할 게 아니라 시민운동과 사회활동을 같이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님은 “입적할 때 오도송을 만들어내고 임종게를 만드는 것은 부당하다. 효봉 스님, 탄허 스님도 잘못 살았다며 만들지 않았어. 정직해야 한다. 깨닫는 데 무슨 오도송인가. 나의 입적 후 임종게는 없다. 내모습 그대로가 임종게가 아닌가”라고 일갈했다.
스님의 회고록에는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한 쓴소리들이 많이 담겨 있다. 때론 사회에 보내는 목소리도 따끔하다. 스님은 “인도적 차원의 대북 지원 이외에 남북 문제에 있어서 휘둘리지 말아야 하며, 시민사회운동은 도덕성을 그 뿌리에 두어야 한다”고 했다. 시민운동 활동가의 원칙 없는 정치 참여나 일부의 도덕성 문제를 질타한 것이다.
세상이 이런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평소 스님이 보여준 진심 담긴 행보 때문이다.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불교계뿐만 아니라 사회에 던진 메시지는 크고 묵직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