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이덕봉칼럼] 문화강국으로 가는 길

다양한 문화 수용 유연성 필요
문화에 대한 관심과 참여 절실
공동체 친화력·국제성 고려를
고유 문화 계승·발전시켜 가야
10월은 문화의 달이다. 문화예술에 대한 국민의 이해와 참여를 높이기 위해 1972년에 제정한 지 올해로 45년째가 된다. 전국의 지자체들은 해마다 많은 비용을 들여 다채로운 문화 행사를 열고 있다. 반세기에 걸쳐 문화 융성을 위해 천문학적인 비용과 노력을 쏟은 만큼 우리는 세계에서 인정할 만한 문화강국으로 성장했는지 묻고 싶다.

올해에도 여러 지자체의 홍보물에는 ‘문화시민’이라는 용어가 곧잘 눈에 띈다. ‘문화시민’의 ‘문화’란 문명개화라는 의미로 20세기 초반에 서구화의 상징처럼 사용되던 말이다. 21세기에 세계 굴지의 고학력 국가인 한국에서 개화기의 수식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시민들의 공공질서 수준이 심각하거나, 시민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인식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이덕봉 동덕여대 명예교수·전 한국교육문화융복합학회 회장
‘문화강국’의 문화는 인류가 삶의 지혜로 일궈 낸 각종 유산과 생활양식을 가리킨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고려대장경, 동의보감 등을 비롯하여 족보, 난중일기, 토정비결, 금속활자와 같은 뛰어난 기록 관련 유산을 보유한 우리나라는 분명 문화강국이다. 문제는 더 이상 계승 발전시켜 세계화시킨 실적이 없다는 점에 있다. 지난번 추석에도 우리는 지역 주민들이 기획한 이렇다 할 전통 축제 하나 없었다. 24절기가 공동체의 축제로 가득했던 옛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수입된 외래문화를 즐기기에 급급하다. 인터넷 매체를 통한 한류 붐에 힘입어 K팝과 드라마 등 세계인에게 다가갈 기회는 확보했지만, 고유문화가 다른 민족에게 수용되어 그들의 삶을 윤택하게 한 사례는 없다. 우리 스스로 고유문화를 현대 생활에 맞춰 계승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물려받은 훌륭한 문화유산을 계승 발전시켜, 자타가 인정하는 ‘문화강국’이 되는 일이다.

문화강국이 되는 첫째 조건은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는 유연성이다. 우리 사회 도처에서 불통이라는 볼멘소리가 들리는 것은 다른 문화에 대한 소통 능력 즉 유연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특히 문화 지도층의 문화에 대한 사고가 유연할 때 젊은이들의 상상력이 탄력을 받아 창조적인 다양한 문화가 넘쳐나게 될 것이다.

둘째 조건은 문화에 대한 관심과 참여이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고 문화생활을 즐김으로써 문화 소비 시장이 활발해질 때 문화는 융성하기 마련이다. 고유문화에 대한 관심도를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학교교육에서 체험하는 것이다. 어릴 적에 몸에 익힌 문화 체험은 평생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셋째 조건은 공동체의 친화력이다.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문화는 친화력이 높은 공동체에서 형성된다. 45년째 되풀이해 왔듯이 관이 주도하는 전시적 행사만으로 문화는 뿌리 내리지 않는다. 하루빨리 민간 주도의 문화행사로 전환해야 한다. 사라진 마을 공동체의 부활이 시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넷째 조건은 전통문화의 국제성이다. 모든 외래문화는 현지 문화와 절충하며 정착한다. 기업이 상품을 현지화해서 출시하듯 문화 콘텐츠도 현지화가 필요하다. 한국의 불고기가 일본식 소스를 개발함으로써 일본의 식문화에 정착한 것은 좋은 사례이다. 유럽에서 우리의 전통 음악과 미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여 활약 중인 예술가들이 많은 데에서도 그 가능성을 본다. 주관부서에서는 전통문화의 국제화 작업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창의적인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인공지능(AI)에 의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문화콘텐츠의 위력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국민 모두가 문화생활에서 삶의 가치를 찾아 삶의 질을 높이고, 우리 젊은이들이 국제화된 전통문화에 힘입어 세계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이덕봉 동덕여대 명예교수·전 한국교육문화융복합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