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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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중병 걸린 미술협회… 문화행정 인사 영입해 개혁 나서야”

이사장 선거 앞두고 공론화 나선 중견작가 이제훈
한국미술협회는 국내 미술계의 최대 단체다. 하지만 그 덩치에 걸맞은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수장인 이사장 선거 때마다 많은 돈이 쓰이고, 선출 과정에서 변칙과 잡음이 흘러나오고 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미술인들조차 한국미술협회를 외면하고 있다. 협회가 운영하고 있는 대한민국미술대전도 공신력이 추락한 지 오래다. ‘그들만의 리그’라는 자조와 탄식만이 있을 뿐이다. 내년 1월 임기 4년의 이사장 선거가 치러질 예정이다. 오는 11월 후보등록을 앞두고 외부인사를 이사장으로 추대해 미술협회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게 일고 있다. 그 중심에 중견작가 이제훈(56·서양화)이 있다.

“미술협회는 이미 작가는 물론 미술애호가와 대중에게조차도 신뢰를 상실했다. 자연스럽게 정부와 기업의 지원도 중단됐다. 미술인들의 꿈을 담을 공간이 더 이상 아니다. 한국미술의 미래는커녕 당장의 과제조차 해결할 수 없다. 실력 있는 미술가는 떠났고 점점 더 외면받고 있다.”

그는 여느 시대 누구에게나 꿈이 필요하고 그 꿈을 좌절케 하는 조직이라면 개혁은 불가피하다고 강조한다.

“미술협회에서 하는 가장 큰 행사 중 하나가 신진작가를 발굴, 육성하는 미술대전이다. 신진작가 경영의 그릇인데 그 그릇에 때가 끼고, 이끼가 끼고 이제는 냄새가 나서 정부도 사회도 언론도 청년작가도 고개를 돌리고 멀리 피해갈 정도다.”

작업실 책장에 법정 스님과 함석헌 선생의 사진을 비치해 놓고 늘 마음을 다잡는다는 이제훈 작가.
그는 미술협회는 중병에 걸린 환자라고 단언했다. 이대로 자기정화나 자기혁신을 기대한다는 것은 나무 위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이라고 했다.

“미술협회는 스스로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중환자의 지경에 이르렀다. 의사가 대수술을 집행해야 겨우 회생을 기약할 수 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미술협회 개혁을 회원 스스로에 맡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수술집도의와 같은 역할을 외부인사 이사장을 영입해 맡기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지난해부터 미술협회 이사장과 집행부는 물론 미술계 원로들에게 호소를 해오고 있다. 미술산업의 가치를 잘 인식하고 있는 지도급 인사들을 이사장으로 모셔와야 한다. 미술인들 중심의 경영과 정책의 성적표는 이미 미술협회의 초라한 현실이 잘 말해주고 있다.”

최근 그는 문화행정의 경험이 있는 장관 출신의 인사는 물론 기업경영인들을 두루 만나보고 있다. 상당한 의견 접근과 교감도 했다. 미술계에서는 벌써부터 이어령, 유진용 전 문화부 장관과 이종덕 예술의 전당 사장 등이 거론되고 있다.

“기존의 방식으로 이사장 후보로 나서려는 분들이 여러 명 계시는 걸로 알고 있다. 나름의 장점을 지닌 분들이다. 이분들은 외부 영입 이사장 체제에서 부이사장으로 참여해 이사장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면 된다. 상생의 미술협회를 만들기 위해선 진흙탕 야합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국미술협회 개혁의 깃발을 든 이제훈 작가는 향을 피우고 차 한 잔을 마신 후에 작업에 들어간다. 그는 “법정 스님이 생전에 주신 향이 계기가 됐다”며 “작업은 캔버스와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란 가르침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그는 영입된 이사장이 제대로 일하도록 미술행정, 미술시장, 미술인 3박자의 조화로운 뒷받침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전경련, 정부부처 등에서 경험을 쌓은 분들도 활용해야 한다. 여기에 양심적인 원로작가들도 부이사장으로 영입해 이사장이 일을 잘 할 수 있게 돕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미술협회가 미술산업의 한 축을 이끌게 될 것이다.”

그는 문화관료 출신으로 영화계를 이끌고 있는 부산국제영화제 김동호 이사장을 본보기로 들었다. “미술협회의 룰모델은 한국영화를 세계적으로 견인한 부산국제영화제라고 생각한다. 영화계 인사가 아닌 문화행정경험을 가진 이를 외부에서 수혈해 활용했기에 오늘의 한국영화가 있게 됐다. 영화계 내부의 논리에 매몰돼 진영싸움만 했다면 어떻게 됐겠는가. 미술계는 영화계를 벤치마킹해야 한다.”

외부인사 이사장 영입을 위해선 미술협회 정관개정이 시급한 과제다. 임시총회를 열어 회원들의 동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대다수 미술계 인사들과 회원들이 공감하고 있어 정관개정에는 별 문제가 없다. 1만여 명의 정회원을 상대로 서명작업에 착수했다. 조만간 절반 이상의 회원들이 서명할 것이다.”

그는 요즘 미술계 인사들을 두로 만나며 공감대를 만들어 가고 있다. 토론회나 공청회도 주선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미술협회가 더 이상 생계형 놀이터라는 비아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자존감을 먹고사는 작가의 한 사람으로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다. 이제는 협회가 작가들과 한국미술의 꿈을 키우는 산실로 거듭나야 한다.”

그는 미술협회와 관련해서 무엇을 하려고 하면 외면받는 현실이 서글프다. 언론 등 누구도 만나주려 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상 기피인물이 된 기분이다. 진실마저 호소할 길이 없는 통탄할 처지가 미술협회의 자화상임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그를 버티게 해주는 이들이 있었다.

“그동안 내가 작가로서 숨쉬고 고민할 수 있게 한 분들이 많다. 한 집에서 6년간 동고동락한 동화작가로 잘 알려진 고 정채봉 선생이 인연의 고리역할을 했다. 법정 스님, 소설가 조정래, 장사익 선생 등이다. 시대를 바라보고 고민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많은 것을 배웠다.”

그가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미술계의 일에 적극 나서는 것도 감투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에겐 시대를 고민하는 차원에서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보는 한국역사’를 읽고 씨 (씨알)사상을 만나게 되고 박재순, 김경재, 김원호 선생과 인연을 맺게 된다. 씨알사상을 통해 동학사상도 깊게 이해하게 됐다.

“그림을 그리는 마음의 기둥과 작가의 고민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다. 미술계를 놓고 고민하는 것도 내 작업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일 년에 몇 번씩 만남을 갖고 있는 황재형 작가도 그의 등을 현장의 고민으로 떠미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고민의 씨앗을 뿌려주시는 고마운 분들이다. 그분들의 에너지가 든든히 나를 밀어주고 있다.”

그분들에 대한 감사함 등 이 세상에 감사헌금 내는 심정으로 일을 하라며 많지 않은 돈을 그의 손에 쥐여주고 있는 아내가 그에겐 가장 눈물겹게 고맙다. 사내로서 일평생 하나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는 응원이 큰 힘이 되고 있다.

요즘 들어 그는 부쩍 정채봉 선생의 짧은 시 ‘어머니’를 떠올려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정 선생은 할머니 손에 자라 엄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마흔이 넘어서 쓴 시로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하루만이라도, 반나절이라도 세상에 오실 수 있다면 어머니 가슴에 얼굴을 묻고 세상에 있었던 일들을 다 일러바치고 싶다노라’는 참 가슴 메고 눈물겨운 시다. 양심 있는 미술인들의 심정도 이럴 것이다.”

그는 미술인들이 미술계의 부끄러운 일들을 어디에 말할 수 있겠냐며 통탄했다. 그동안 ‘누워서 침 뱉기라’라 여기며 냉가슴만 앓았다. “지금 미술계는 터지기 직전의 풍선과도 같다. 조금만 욕심들을 내려 놓는다면 훨훨 나는 풍선이 될 것이다. 거기에 우리 미술계의 꿈을 두둥실 달아 띄워야 한다.”

아침햇살이 눈부신 날 아침 그는 순천 가톨릭 공원묘지에 묻혀 있는 정채봉 선생을 찾았다. 내년 봄 미술계의 좋은 소식을 안고 오겠노라고 약속했다. 고인이 눈부실까봐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묘소에 놓고 왔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