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감사 돌아가는 모양을 보니 올 100일 정기국회도 틀렸다. 20일짜리 국감이 여당의 보이콧과 사보타주, 미르·K스포츠재단 의혹 공방으로 맹탕이 됐으니 나머지 국회 일정은 보나마나다. 국감은 그렇다 치고 국감이 끝나고 시작될 예산 심사를 생각하니 걱정이 태산이다. 정치 공방으로 날을 새우다 처리시한에 쫓겨 벼락치기 심사로 끝낼 공산이 커졌다. 그동안 예산 심사가 심사답게 이뤄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요즘 “국민들이 국회 실상을 다 안다면 틀림없이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는 말을 하고 다니는데, 그 ‘국회 실상’에는 예산 심사도 포함돼 있다. 5선 의원 출신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국회의원을 하며 자괴감을 느꼈던 순간은 언제나 12월 말이었다. 국회에서 예산 심의라는 것이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이뤄진다”고 고백했다.
김기홍 논설실장 |
이런 부실 심사를 해마다 되풀이하다보니 정부가 국민의 세금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쓸 건지(예산 심사), 또 어떻게 썼는지(결산 심사) 감시하고 견제하는 실력이 시원찮은 건 당연하다. 정부가 편성해 놓은 예산 가운데 13조원을 쓰지도 않았으면서 경기가 어렵다고 11조원 추경을 요구해도 그대로 통과시켜주는 얼토당토않은 짓을 한다. 정부는 국회에 충실한 예산 심사를 바라지 않는다. 여야 싸움에 국회 등이 터져 시간을 허비해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국회 회의장에 ‘여야 싸움으로 몰고 가야 한다’는 공무원 쪽지가 돌아다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회가 아무리 날고 뛰어도 정부 예산안 가운데 주무를 수 있는 돈은 3조원 안팎에 불과하다. 그동안의 예산안 심사 결과가 그렇다. 400조7000억원의 새해 예산안 심사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정부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우는 아이 달래듯 던져줄 떡을 준비해놓고 있다. 떡의 크기는 1조원 남짓이다. “여야가 나눠 갖는 돈이 1조원 정도인데 그거 갖고 가면 일반 의원들이 붙어 지역예산으로 가져간다. 나도 쪽지 예산 넣어서 30억원을 가져온 적 있다”고 한 게 남 지사의 경험담이다. 의원 300명이 고작 1조원을 나눠 갖고 국회 1년 농사를 다한 것처럼 한다면 창피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올해 충실한 예산 심사를 위해 미르·K스포츠재단 의혹 등의 진상 규명은 잠시 미루자. 지금은 여소야대다. 예산 심사는 야당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모르쇠로 버티는 여권을 상대로 각종 의혹 규명에 매달리다보면 예산 심사는 뒷전으로 밀려날 것이 뻔하다. 과거처럼 예산안을 볼모로 정부 여당을 압박할 수도 없다. 국회선진화법에 따라 12월1일 자정을 넘기면 정부의 예산안 원안이 국회 본회의에 자동으로 넘어간다. 입만 열면 민생 민생 하면서 나라살림 심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면 민생이 아니라 민폐다.
김기홍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