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은 경제 대도약을 위해 문화체육 투자 확대를 기업인들에게 부탁한 것이 전부라고 했다. 대기업들 팔을 비틀어 800억원을 모금하고,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의 설립 허가증이 하루 만에 나오고, 최씨 모녀가 이화여대와 국내외를 휘젓고 다닌 것은 일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다. 대통령 부탁을 받은 전경련과 기업인들이 뜻을 모아 알아서 뛰었든, 이 모든 일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한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든 대통령이 남 말 하듯 하고 넘어갈 계제는 아니다.
김기홍 논설실장 |
최씨가 대통령 연설문을 고친다는 얘기까지 나오자 청와대는 “말이 되는 소리냐”고 펄쩍 뛰었다. 당연히 말이 안 되는 얘기이지만 최씨가 지금까지 하고 다닌 일을 보면 대통령 연설문을 고치는 것 말고 그보다 더한 일도 하고도 남았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의혹이 눈덩이처럼 구르다 보면 사실이 되고 소문은 진실로 둔갑한다.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들 가운데는 사실무근이거나 부풀려진 것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 된다.
호미로 막을 것을 굴착기로도 막지 못하게 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것은 남의 탓이 아니다. 대통령은 “내가 아니라고 하면 끝”이라 하고 참모들은 고언 대신 불충(不忠)을 걱정한다. 삼척동자도 아는 최씨를 안종범 정책조정수석은 “모른다”고 했고, 온 세상이 아는 박 대통령과 최씨의 40년 절친 관계를 이원종 비서실장과 박 대통령의 최측근 이재만 총무비서관은 “박 대통령과 아는 사이지만 절친한 건 아니다”라고 했다. 최씨가 박 대통령 뒤에서 호가호위했다는 풍문이 떠도는데도 청와대가 “전혀 알지 못하고 논의해 본 적도 없다”고 말하는 것도 말이 되는 소리는 아니다.
박 대통령은 두 재단 의혹을 해명하면서 “어떠한 사심도 없다”고 했다. 사심이 없다는 것은 알겠는데 이젠 그런 말도 부담스럽게 들린다. ‘사심이 없다’는 말을 뒤집으면 자신의 결정은 항상 옳고 외부의 비판엔 귀 기울이지 않겠다는 뜻이다. 박 대통령은 어제 국회 시정연설에서도 온 국민이 듣고 싶어 하는 ‘左순실 右병우’ 얘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개헌 문제를 불쑥 꺼냈다. 청와대 사람들은 청와대 밖 어떤 말도 들으면 안 된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청와대 담장 밖 세상과 맞서 싸우기로 작정한 것이 아니라면 이럴 수가 없다.
김기홍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