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머리에 배치한 ‘귀향’은 이번 소설집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작품이다. 안국역 근처 작은 세무사 사무실과 집을 오가는 게 일상의 전부인 그녀가 이야기를 끌어간다. 이름은 없다. 그녀가 그가 사는 지방 도시의 낡은 아파트와 그 주변의 무심한 듯 맥 빠진 풍경, 다른 우주처럼 다가오는 그곳을 찾아 격주로 내려간다. 남자는 아버지를 닮았다. 다만 아버지는 뿔이 달려 무서웠는데 그의 머리에는 뿔이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를 닮아 한없이 과묵하고 옆에 있어도 없는 것처럼 하나도 부담스럽지 않다. 그 남자를 만나고 오면 입 안 가득 수포가 생겨 더운 물도 차가운 물도 마시지 못했고 온몸은 부풀어 올랐다. 그래도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지방도시로 내려가기 위해 일들을 초고속으로 처리했다.
![]() |
| 다섯 번째 소설집을 펴낸 소설가 강영숙. 그는 “소설도 문서도 아닌 것을 지칭하려는 듯 ‘회색문헌’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
다시 새롭게 나타난 한 여자는 “어릴 때 집 주변의 아스팔트 위를 돌아다니던 정신 나간 여자 얼굴과 비슷했고, 또 어떻게 보면 죽기 직전의 엄마나 엄마 자매들과 비슷”하다. 야구모자 남자가 간 곳은 화장장과 교도소가 있는 곳이다. 그녀의 그는 어디로 갔을까. 이불 속에서 ‘말하는 고양이 안젤라 앱’을 작동시켜 물었더니 파란 눈의 고양이 안젤라는 답한다. “고향에 있어! 고향에.”
이 어지러운 반추상화에서 구체적인 인과관계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불모의 세상에서 한갓된 유사 사랑은 희미하게 존재할지 모르나 궁극의 우리 고향은 쓸쓸한 폐허라는 지독한 디스토피아의 세계관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절망적인 희망 한가닥조차 완전히 놓아버리지는 않는다. 정신병자들과 치매 걸린 이들로 가득한, 떠나온 곳 혹은 생의 근원인 그곳 회색지대를 그나마 돌보고 껴안아야 한다는 의지를 말미에 슬쩍 내비치고 있다.
이어지는 단편 ‘플록’에서 J는 환경운동가 K의 녹취록을 정리하는 역할을 맡는다. J에게 이 과정은 “최종 단행본이 되기 이전의 자료, 공식 자료 이전의 자료, 과정을 보여주는 회의 자료, 최종 결과물이 나오면 결국 폐기하게 될 자료를 통칭하는, 회색문헌(grey literature)을 작성”하는 것과 같다. ‘불치’에 나오는 엄마는 “어깨를 웅크린 채 재즈 가수의 스캣을 연상시키는 신음을” 낸다. 꿈에서 깨어난 듯 엄마의 고통을 바라보는 화자에게 엄마는 ‘국수를 먹고 싶다’고 말한다. ‘맹지’ ‘해명’ ‘검은 웅덩이’ ‘가위와 풀’이 이어진다. 재즈 가수의 깊은 스캣처럼 절망의 밑바닥에서 힘겹게 음각하듯 써나간 ‘회색문헌’ 들이다. 강영숙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서 “늘 나로 인해 누군가 희생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져버리기가 어렵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