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예찬의 대상이었던 근대 조선의 청년들도 백수의 날들을 통과하고 있었으니 고학력자의 취업난 때문이었다. 1929년 신문사설 ‘졸업생 제군에게’를 보면 “활동무대가 매우 국한되어서 취직난의 비명을 듣게 된 것은 동정을 금치 못할 일이다. 취직난이 심각하다는 것은 그만큼 이 사회의 실상이 결함 많고 경색되었음을 뜻한다”고 피력하고 있다. 하여 당시에도 ‘구직(求職)보다 조직(造職)’, 그러니까 취업보다는 창업을 권장하고 있다. 그러니 청춘예찬은, 자신의 청춘을 구가할 수 없는 청춘들에게 보내는 위로와 분발의 전언이었던 셈이다.
정끝별 이화여대 교수·시인 |
“‘아프리카 청춘이다’, ‘아프면 환자다’라는 말들에 더 공감하게 된 사회”,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열정페이를 강요받고, 지치고 힘들 때조차도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억지웃음을 강요받는다”, “무한한 청춘의 가치는 최저시급 6120원에, 성실한 노동과 단정한 용모와 친절한 서비스로 평가된다. 직장에 대한 헌신과 저녁이 있는 삶의 포기를 요구한다”와 같은 문장들에서 나는, 강의실에 앉아 있는 청춘들의 뒷모습 혹은 강의실 밖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2016년 10월 오늘, 여기는 대학/ ‘억압’ 속 들어갈 알맞은 답을 쓰시오.(각 3점)/ 학점 억압, 과제 억압, 스펙 억압, 면접 억압, 취업 억압……/ 넣기만 해도 답이 되는 즐거운 시험문제”, “다(多)다(多)다(多)/ 나는 청춘이다/ 매일 같이 양손이 무겁다/ 아아, 이쪽은 걱정이고,/ 눈물이고, 좌절이다/ 아아, 이쪽은 사랑이고/ 열정이고, 꿈이다/ 나는 지금/ 청춘이다(多)”와 같은 시 구절에서는 간결하면서도 통쾌한 풍자의 힘을 읽기도 했다.
그럼에도 청춘들은 각자의 답을 찾아가고 있었다. “우리의 청춘이 값싸게 팔리는 이유는, 청춘이 아닌 이들이 만들어놓은 구조에 구속돼 있기 때문이다. 명문대 졸업, 대기업 입사, 고액 연봉 등으로 이어지는 ‘성공’의 굴레를, 우리는 너무도 순순히 따른다. (…) 자유를 갈망하는 청춘의 해방, 그것은 우리의 값어치를 부정당하는 것에 저항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다”, “청춘은 곧 외설이자 예술이며 그 자체로 혁명이다. 나의 청춘을 예술로 만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도 ‘누구나’의 청춘이고 싶지 않다. 나는 아무에게나 ‘아무나’의 청춘이고 싶지 않다. 내가 청춘이 아니길 바랄 때에, 나는 청춘이리라”라고 말할 때 가슴 뜨거워졌던 이유.
찬바람이 부는 취업시즌이다. 4학년 강의실에서는 면접을 위해 결강을 하는 학생이 늘고 있다. 100만명에 가까운 청춘들이 미취업으로 1인당 676만원의 학자금대출 빚을 지고 있고, 연일 청년실업률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청년고용 절벽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청춘들이 덤핑세일되는 청춘유감의 시대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노오력’을 ‘극뽁’으로 밀고 나가는 견실한 청춘들이 있기에, 자본과 무한경쟁 바깥에서 다른 세상을 꿈꾸는 진정한 청춘들이 있기에, 청춘예찬은 여전히 여실한 것이고 마땅히 요청돼야 하는 것이다.
정끝별 이화여대 교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