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을 뜻하는 단어인데 정작 글씨는 흰색 물감으로 쓰였다. 가만히 보면 다른 단어들도 마찬가지다. ‘노랑’이라는 의미의 영단어 ‘옐로’(Yellow)는 분홍색 물감으로 적혔다. 빨강의 단어 ‘Red’는 청색(Blue)으로 칠해졌다. 심지어 초록색 물감으로 쓴 ‘블루’는 철자마저 ‘blue’가 아니라 ‘bule’로 잘못 표기됐다. 2017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출품작가인 코디 최(Cody Choi·55)의 신작 채색화 시리즈다.
“텍스트가 원래 뜻하는 색과 다른 색으로 채색함으로써 이성과 감성 사이의 갈등을 연출하고 싶었다. 유럽에서 부자들의 권력을 상징하는 보라색과 이데올로기 성격의 붉은색은 화폭 중심으로 끄집어냈다. 정신적(이성적)으로 더 각인된 색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동안 개념미술에 주력해 왔다. 이성을 주로 다뤄 왔다는 얘기다.
“좌뇌로 읽히는 글자와 우뇌로 읽히는 색을 바꿔 놓음으로써 글자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의도한 셈이다. 결국 예술은 감성을 절대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은 마음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작품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유치한 의도도 있었다.”
신작 앞에 선 코디 최. 그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요즘 젊은 작가들의 감각적 아이디어다. 그는 “적어도 미술작품은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며 “오랜 시간 자기 삶을 통해 자기만의 철학과 체계를 만들기 전까지는 그저 연습을 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
새로운 공간연출도 같은 맥락에서 이뤄지고 있다. 나이트클럽 같은 분위기다. 사이키 조명과 흰 연무가 공간을 몽환적으로 만들고 있다. 테이블 위에는 클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각종 술잔이 정물처럼 놓여져 있다.
공간 한쪽에 설치된 음향기기에선 영화 ‘라붐’의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인 ‘리얼리티’(Reality)와 ‘링 마이 벨’(Ring My Bell)이 흘러나와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리얼리티’는 진실이란 이성적 요소가 비교적 강한 반면, 몸이 확뜨거워지는 순간과 이성에게 한순간 꽂히게 되는 의미를 지닌 ‘링 마이 벨’은 감성적 요소가 강한 노래다.
“클럽은 이성보다 감성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그런 공간에서조차 이성과 감성은 충돌하게 마련이다.”
사실 개념미술은 시각적 감성적 요소가 강한 추상표현주의에 반기를 들면서 부각된 사조다. 물감을 마구 뿌려 놓고 미술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거부의 몸짓이다. 1960~1990년대의 개념미술의 큰 흐름이 그것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 개념미술의 과용에 질려 있는 상태다.
“세끼를 모두 떡볶이만 먹는다고 생각해 봐라. 개념미술이 그런 꼴이다. 그 얘기가 그 얘기이고 남발되고 있다. 너무 익숙해져 식상하기조차 하다.”
하지만 그가 개념미술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대안도 모던적 사고인 1 더하기 1은 2라는 식의 답은 없다고 본다.
“한계에 대한 해결책으로 정답을 찾는 방식이 아니다. 정답이 아니라 의미만으로 얘기하려고 한다. 어떤 의미가 정답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의미는 사라지게 된다. 노자가 도를 도라고 말하면 도가 아니라고 말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롱랑 바르트 등이 말했던 의미 해체, 의미 확장만이 있을 뿐이다.”
그의 개념미술작업이 감성쪽으로 의미를 확장해 가고 있다는 태도로 읽힌다. 이런 시도들이 세계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이유다. 지난해 독일 쿤스트할레 뒤셀도르프를 시작으로 프랑스 마르세유 현대미술관 등 유럽 각국 미술관에서 전시가 열렸으며, 내년에도 스페인 말라가대학 미술관, 독일 켐니츠미술관 등에서 전시가 예정돼 있다.
코디 최는 순수미술 작가이지만 문화이론가로도 이름이 알려져 있다.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재학 중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리오혼도 칼리지에서 예술문화학을, LA아트센터 디자인대학에서 예술을 전공했다. ‘20세기 문화지형도’ 등이 그의 대표 저서다.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출품작 제작기금 마련 목적으로도 30일까지 PKM갤러리에서 신작을 선보인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