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오늘의시선] 시스템 붕괴의 참혹한 결말

‘최순실 국정농단’ 여당과 검찰이 방조
정치·사회 바로잡아 한 단계 성숙을
커피 한 잔, 카네이션 한 송이를 학생으로부터 받아도 위법이 된다는 사실에 속이 편치 않았다. 정치권력을 투명하게 하려고 시작한 ‘청탁금지법’이 정치권력은 빠져나갈 틈을 벌려주고, 상식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아리송한 모호성을 극대화해 합법과 위법에 대한 퀴즈법으로 전락했을 때 그랬다. 그래도, 우리가 깨끗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불편과 모순을 통과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수많은 국민이 묵묵히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최순실 사건이 터졌다. 학생들은 ‘이게 나라입니까’라고 묻는다. 할 말이 없다. 이러한 불합리와 비리를 속에 감춰놓고 겉으로 창조경제, 손톱 밑 가시와 부패 척결을 외쳤던 권력자들을 생각하면 배신감이 든다. 정권이 독점했던 권력, 비판적 국민에게 그들이 보여줬던 독선과 배타에 비례해 배신감과 저항의 강도는 강해질 수밖에 없다.

행정학의 입장에서 볼 때, 이번 사태의 원인은 시스템 붕괴에서 비롯된 참극이다. 교과서에는 국가를 움직이는 관리체계에 계선과 막료라는 두 가지가 나온다. 계선은 상하관계에서 결재 라인에 있는 공식적 조직을 말하고, 막료는 수평적 참모조직을 말한다. 막료도 물론 공식적 조직이다. 최순실 사태로 보자면 행정학 교과서는 수정돼야 한다. 계선과 막료 조직 이외에 비선 조직이 있는데, 이는 실제 상하관계의 결재 라인이나 참모가 아니면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실제 정책을 주무를 수 있는 측근을 규정하는 말이다. 대통령이나 권력자가 개인적으로 감정적 위로를 받고, 아이디어와 조언을 얻는 것은 어디에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공식적 조직을 와해시키고, 그 영향력이 사적인 이익과 영달을 위해 사용됐다면 이것은 엄벌해야 할 사안이다.

이종수 연세대 교수·행정학
최순실 사태를 전후로 시스템이 붕괴됐던 현상을 되짚어보면 여러 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우선,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최순실을 국정감사에 부르려는 시도를 여당 의원들이 막았다. 언제부터인가 국정감사는 야당이 혼자 하는 것이고, 여당은 방패막이와 방해를 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국회와 정부 사이의 건전한 관계가 와해된 채 국정감사가 오랫동안 지속돼 온 것이다.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 도무지 여당은 국정감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이다. 우병우 역시 국회 운영위원회가 출석을 요구했지만 청와대가 반대하고 본인 역시 출석을 거부했다. 도대체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회가 고위 공직자를 부르는데 나오지 않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소리인가. 검찰은 제대로 작동됐는가. 우병우와 최순실 등에 대해 수많은 의혹과 소문, 고발이 있었음에도 수사하지 않고 모르쇠로 일관하다 국민이 일어난 뒤에야 수사하니 뒷북 수사라는 비판을 받는다. 이런 것들이 모이니 결국 촛불은 타오르지 않을 수 없고, 대통령은 최후의 상처를 치명적으로 입게 되는 것이다.

이번 사태는 한국 사회에 하나의 기회다. 혼란이라고 언론이 진단하지만, 우리 사회 내에서 부조리한 충돌이 크게 일어나는 게 아니고,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합의가 광범하게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붕괴된 현상을 진단하고 교정한다면 우리는 한 단계 성숙한 사회로 올라설 수 있다. 정치권력과 정부정책의 관계 재설정, 국회의 행정부 견제장치 강화,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독립성 제고, 대통령 권한의 분산과 투명성 확보가 우리가 검토해야 할 과제이다. 단순히 대통령의 임기를 5년 단임에서 4년 중임으로 바꾸는 개헌을 한다고 해서 해결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역설적으로, 필자는 이번 사태에서 한국 사회의 희망을 본다. 한국에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정말 자리 잡았는가 회의가 들 때도 있지만, 이렇게 분명한 자기교정 능력을 갖춘 민주주의를 유지시켜 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교훈을 얻고, 바로잡기만 한다면 말이다.

이종수 연세대 교수·행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