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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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규칼럼] 기만의 정치

최순실 일당과 폭군·혼군·용군… 연루자들 일제히 물러날 때 / 국정시스템 복원하고 개혁해 공정·정의의 세상 열어나가야
율곡 이이는 젊은 관료 시절에 ‘동호문답’을 지어 새 임금 선조에게 올렸다. 왕도정치에 대한 경륜을 문답식으로 서술한 이 개혁보고서에서 정치를 문란하게 하는 세 가지로 폭군(暴君), 혼군(昏君), 용군(庸君)을 꼽았다. 폭군은 “욕심에 마음이 흔들리고 바깥의 유혹에 빠져 백성의 힘을 다 빼앗아 자신만 생활하고 충언을 물리치고 자기만 성스러운 체하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자”다. 혼군은 “정치를 잘하려는 뜻은 있지만 간사한 자를 분별하는 총명이 없고, 믿는 이가 어질지 못하고 관리들은 재주가 없어서 패망하는 자”다. 용군은 “나약해 뜻이 확립되지 못하고, 과단성이 없어 구태만 되풀이하다가 날로 쇠약해지는 자”다. 모두 나라를 망치는 지도자다.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은 세 가지 중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 아무런 공적 권한도 능력도 없는 최순실과 그 주변 인물들이 국정을 쥐락펴락하도록 방치했다. 이들의 행태는 한마디로 사특하기 이를 데 없다. 정부의 정책 결정이나 각종 인사에 개입하고 불법 모금을 했다. 정부와 여당은 물론 재계·문화체육계·교육계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분탕질했다. 박 대통령도 대기업 총수들과 만나 미르·K스포츠재단 모금 협조를 요청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우리나라 국정시스템이 이처럼 허술하리라곤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옛날과 비교하면 왕도정치도 패도정치도 아닌 기만의 정치다. 

박완규 논설위원
최씨와 주변 인물들에게 휘둘린 정치인, 고위 공무원, 대기업에도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해선 안 되는 일을 시키는 대로 했다면, 속셈이 있지 않겠는가. 인사 특혜건, 이권이나 정책적 혜택이건 간에 뭔가를 얻으려 했기에 동조한 것이다. 청와대 경제수석이 지켜보는 가운데 K스포츠재단이 기업 총수에게 재정지원을 부탁하고 기업 세무조사 무마 요구를 받았다는 회의록 자료를 보면 참담하기까지 하다. 개발시대에 부패 공무원과 업자가 술집 음습한 뒷방에서 주고받던 수작과 무엇이 다른가.

돌이켜 보면 뜬금없이 대통령이 “통일 대박”, “혼이 비정상” 발언을 하고 늘품체조 시연회 같은 행사가 열렸다. 지금은 왜 그랬는지 짐작할 수 있다. 대통령을 배경 삼아 호가호위한 최씨 일당은 온갖 엉뚱하고 추잡한 일을 벌이면서 사리사욕만 채웠다. 이 과정에서 국민은 영문도 모른 채 휘말리고 피해를 입었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주권자인 국민을 감쪽같이 속인 데 있다. 국민이 분노로 치를 떠는 이유다. 국정시스템을 흔들어대면서까지 그런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외국 언론 보도를 보면 망측스럽기까지 하다. 국격은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실추됐고, 국가 기강과 국민 자존감은 무너졌다.

조선 후기 실학자 최한기는 ‘기측제의’에서 “몸소 행하고 있는 자는 스스로 크게 기만당하고 있는 줄 알지 못하고, 곁에서 듣는 자는 혹 끝난 뒤에 짐작하며, 처음 발언할 적에 알아차리는 이는 별로 없다. 기만이 커지는 것이 실로 이에 기인한다”고 했다. 이어 “어쩌다가 속임을 당하는 것은 족히 수치스러울 것이 없고 속임을 당하고도 속은 줄을 깨닫지 못하는 이것이 수치스러운 것이다”고 했다. 오랜 기간 기만당하고도 그걸 알아채지 못한 우리 모두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12일 민중총궐기 집회를 앞두고 기로에 선 박 대통령은 어제 정세균 국회의장을 만나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새 총리 후보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국회 추천 총리의 권한이나 대통령 탈당에 대해선 입을 닫았다. 국면전환용, 시간벌기용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더 이상 꼼수로 위기를 모면하려 해선 안 된다. 이제라도 국정 최고책임자답게 의연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동안 국민을 기만한 데 대해 속죄하고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는 수밖에 없다. 그게 사는 길이다. 정부와 정치권, 공공기관 등 곳곳에 남아 있는 연루자들도 일제히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이 지점에서 국정시스템을 되살리고 개혁하는 험난한 여정에 나서는 길을 열어나가야 한다. 국민 모두가 함께 가야 하는 길이다. 우리의 자녀 세대가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에서 떳떳하게 살게 하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박완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