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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지금의 국정 마비 사태를 막을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렸다.
2014년 11월 28일 세계일보의 ‘정윤회 문건’ 보도는 비선 실세 운용에 대한 경고음이었다. 당시 청와대는 보도 내용의 진위를 파악하는 데에 관심이 없었다. 문건유출 혐의로 처벌된 한일(46) 전 서울경찰청 경위의 인터뷰 내용<세계일보 11월 12일 자 1·2면 참조>이 이를 증명해 준다. 당시 청와대와 검찰은 국정농단 의혹은 문건 유출사건으로 둔갑시켜버렸다. 프레임 전환에 성공했을지 몰라도 국정농단을 바로잡을 기회는 놓쳐버린 것이다.
‘정윤회 문건’을 보도한 세계일보 2014년 11월 28일 자 1면 기사. |
박 대통령이 막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도 세계일보는 정수장학회 탈세 의혹을 처음으로 보도한 적 있다. 18년간의 칩거를 끝내고 1998년 대구 달성 보궐선거를 통해 정치에 입문한 박 대통령에 대해 처음으로 중앙 언론에서 제기한 비리 의혹이었다. 박 대통령의 대응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이른바 ‘문고리 3방’과 보좌진의 맏형격인 이춘상(2012년 별세)씨가 박 대통령의 참모 역할을 하던 시절이다.
정수장학회 탈세 의혹을 보도한 세계일보 2002년 3월 21일 자 1면과 3면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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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2002년 3월 21일 자 1면과 3면을 통해 당시 무소속 의원이던 박 대통령이 재단법인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겸임하면서 수억 원의 섭외비를 받아 쓰고서도 소득세를 내지 않았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박 대통령은 1998년 1억 원, 99년 1억3500만 원을 정수장학회에서 받아 썼으나 소득세를 따로 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세법상 섭외비를 재단 업무에 쓴 게 분명하지 않다면 소득으로 간주해 세금을 내게 돼 있었다.
박 대통령 측은 보도에 대해 사실과 다르다고 강력 대응 방침을 밝혔다. 박 대통령 측은 관련 규정을 제대로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2주 정도가 지나 박 대통령 측에서 “세금을 모두 내겠다”고 밝히고 물러섰다. 박 대통령은 당시 취재한 특별기획취재팀에 직접 전화를 걸어 “최근 서울지방국세청을 방문해 문의한 결과 세금을 내야 한다는 유권해석을 받았다”며 세금을 내겠다고 밝히고 “정수장학회 이사장의 연봉이 너무 높다는 지적이 있는 만큼 국민이 이해할 만한 수준으로 연봉액수도 조정하겠다”고 말했다.
정수장학회 관련 박 대통령의 해명을 보도한 세계일보 2002년 3월 27일 자 2면 기사. |
12년이 흘러 대한민국 첫 여성 대통령에 오른 박 대통령은 또 국정농단을 바로잡을 경보음을 듣게 된다. 바로 ‘정윤회 문건’ 보도였다. 임기가 한창인 현직 대통령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다는 건 무모한 일이었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12년 전 경험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공교롭게 2002년 특별기획취재팀에서 보도를 주도한 기자가 ‘정윤회 문건’ 보도 취재를 지휘했다.
이번에는 사뭇 대응이 달랐다. 박 대통령은 “‘찌라시’(정보지)에 나오는 그런 이야기들에 이 나라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은 정말 대한민국이 부끄러운 일”이라면서 국기 문란으로 규정했다. 청와대 측은 ‘국정 농단’을 ‘문건 유출’로, ‘십상시 모임’을 ‘7인회’ 의혹으로 되치기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청와대가 ‘찌라시’라고 했으면서도 검찰은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과 박관천 전 경정 등을 대통령기록물 관리법 위반 혐의 등으로 처벌했다. 이 과정에서 한 전 경위한테서 문서를 건네받은 혐의를 받던 최경락 경위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청와대와 검찰이 ‘정윤회 문건’ 내용에 대해 “사실과 다르다”고 결론지었으나 철저히 파헤쳤더라면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에 제동을 걸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직무유기 논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다. 결국, 조 전 비서관과 박 전 경정은 법원에서 문건 유출과 관련해 무죄 혐의를 받았고 문건 보도·취재에 관여한 기자와 간부들에 대한 명예훼손 고소도 지난 7월 취하됐다.
박희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