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이 하나 된 “하야하라”라는 국민 함성은 벼락 치듯 청와대 창문을 뒤흔들었을 터. 붉디붉은 촛불의 바다를 보고 어찌 숨을 쉬고, 어찌 잠을 이뤘겠는가. 이 세상에 발을 디디고 사는 사람이라면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확인된 건 그저 대변인만 영혼 없는 앵무새처럼 떠든 사실이다. “민심을 무겁게 받아들인다.” 그뿐이다. 8년 전 대통령 이명박은 어쨌는가. 광우병 시위대가 ‘2MB OUT’이라며 촛불의 강을 이루자 뒷동산에 올라 ‘아침이슬’을 따라 불렀다고 했다. 박근혜의 세상은 이 세상과 단절돼 있다.
백영철 편집인 |
이런데도 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는 조건 없는 퇴진을 요구하고 국민과 퇴진 운동에 들어간다고 했다. 촛불 민심을 배경으로 삼아 강제로 박 대통령을 끌어내리겠다는 의지의 표시다. 식물정부가 길어질 수밖에 없다. 혼란상과 국정 표류 장기화는 불가피해졌다.
야당은 길게 봐야 한다. 최소 6개월 정도는 내다보는 눈이 필요하다. 내년 1월 말이면 괴물 트럼프 정부가 미국에 들어선다. 북한 김정은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우리 주변을 둘러싼 중국 시진핑 주석, 일본 아베 총리, 러시아 푸틴 대통령 모두 스트롱맨들이다. 내우외환의 형세에서 식물정부를 방치해 나라에 치명상을 입히는 것은 야당에게도, 야당 대선주자에게도 자멸행위다. 국민이 지금은 박근혜에게 화살을 쏘지만 나라가 만신창이가 되면 야당의 유력 대선주자들에게 화살을 돌리게 될 것이다.
박 대통령의 하야 거부가 확고한 만큼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청와대는 군과 경찰 등 공권력을 지휘하고 있다. 너나없이 무리수를 두면 불상사가 일어날 소지가 커진다. 야당의 하야투쟁은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그보단 헌법 정신에 입각해 시간표를 짜고 탄핵절차에 들어가는 게 순리다. 박 대통령은 직권남용과 공무상비밀누설, 뇌물 등 죄상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국격을 추락시킨 죄가 너무 크다. ‘국가에 해를 끼치는 명백하고 정치적인 범죄’를 저질렀으니 파면할 만큼 엄중하다. 탄핵절차는 나라의 아픔이긴 하다. 그래도 반듯한 나라를 지켜내려면 피할 수 없다. 법 위에 사람 없고 법 아래 사람 없다.
새누리당도 비박계가 있는 데다 양심이 있을 테고, 보수적인 헌재도 검찰수사 결과가 나와 범법행위가 명시되면 압도적인 국민의 퇴진 요구를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탄핵안은 서두르면 내년 봄이 오기 전 처리될 것이다. 그러니 신속하게 거국내각 총리를 박 대통령에 추천해 인준하고, 그로 하여금 내년 봄까지 정국 로드맵을 마련해 발표하도록 해야 한다. 이 기간에 헌재가 탄핵심판을 완료하면 5월경엔 대선을 치를 수 있는 것이다.
위기의 순간 한국의 지도자는 어리석거나 순진하다.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1987년 4·13 호헌선언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려고 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퇴임 뒤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끝내 감방까지 갔다는 사실을,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을 탄핵 심판했던 거대 야당 한나라당이 그해 4월 총선에서 어떻게 망했는지를,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이후 벌어진 1980년의 무질서한 서울의 봄 시위와 야권 지도자의 권력투쟁이 어떤 결말을 불러왔는지를 되새겨야 한다.
백만 촛불이 말하는 것은 ‘최순실 게이트의 몸통은 박근혜’라는 사실이다. 식물정부 상태가 지속되면 수시로 수백만의 촛불이 전국을 물들이고 세계인들이 이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정치가 혼란을 거듭하고 경제가 곤두박질치고 안보가 불안해질 것이다. 대한민국의 수치고 불행이다. 박 대통령은 헌법상 국가보위의 책임이 있다. 대통령이 민심에 맞서 싸우느라 식물정부를 장기 방치하는 것은 국가를 위태롭게 만드는 행위이다.
박 대통령은 헌법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 정말 나라를 생각한다면, 일말의 애국심이라도 있다면 지금이라도 전면적 2선 후퇴를 선언하고 거국중립내각에 헌법상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이양하겠다고 발표해 국가를 보위해야 한다. 조속히 야당이 추천하는 총리에게 권한을 이양하고, 국회에서 개헌을 하면 그 헌법에 의해 대선을 치른 뒤 퇴임하는 것이다. 이 길이 죽어서 사는 사즉생의 길이다. 놓을 것은 한 줌의 권력이고 지킬 것은 한 가닥의 명예다. 아버지 박정희의 이름에 더 먹칠해선 안 된다. 수레를 막는 사마귀처럼 구는 것은 비극이다.
백영철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