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자 말대로다.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은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그토록 강조했던 ‘국민통합’을 이뤄냈다.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운 이들 중 절반은 크라잉넛의 ‘룩셈부르크’를 따라 부르지 못했고, 나머지 절반은 가수 정태춘이 누군지 몰랐지만 세대를 불문하고 집회를 즐겼다. 모인 이유가 다르지 않은 때문이다. 주최 측이 준비한 최순실 동영상을 보며 같이 분노하고, 연단에 선 시민들의 “이게 나라입니까”란 외침에 공감했다. ‘박근혜는 퇴진하라’ 구호가 가장 자주 들렸지만 참석자들 사이에 공명이 컸던 구호는 ‘국민이 주인이다’였다.
황정미 논설위원 |
각양각색 노동단체 깃발이 나부꼈고 야당 의원들도 얼굴을 내비쳤지만 11·12 집회 주인공은 시민들이었다. 그들의 자발적 참여가 없었다면 ‘100만 촛불’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목청껏 구호를 외치는 청년이 옆자리 친구에 말했다. “뭔가 달라지겠지.” 넓은 도심을 촛불로 채운 이들 대부분이 그런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100만 촛불’ 이후 달라진 건 아직 없다. 청와대 관저에서 퇴진 함성을 들었을 박 대통령은 검찰 수사 준비에 한창이다. 쉽게 물러날 뜻이 없어 보인다. 야당들은 촛불 민심에 기대 대통령 퇴진만 압박하고 있다. 대통령이 물러나면 과도내각을 구성해 조기 대선을 치르자는 속내다.
야당의 대통령 퇴진운동은 분출하는 민심의 ‘김’을 빼는 정도다. 복잡한 탄핵 절차를 거치지 않고 조기 대선 국면을 만들겠다는 정치적 계산으로 비친다. 길거리에 쏟아져 나온 시민들의 분노는 권력자를 향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걸 안다. 박 대통령이 퇴진하고 새로 대통령을 뽑으면 ‘국민이 주인’인 대한민국이 되는 건가. 대통령 한 사람에 집중된 권력구조를 손대지 않으면 ‘제2의 최순실’이 등장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촛불 시위가 탄핵에서 구한 노무현 대통령도 결국 친인척 관리에 실패한 대통령으로 끝났다.
지금과 다른 살풍경한 거리 시위가 벌어졌던 1987년 6월항쟁은 국민이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 개헌으로 마무리 됐다. 그때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모인 2016년 11월항쟁도 대통령 진퇴 문제에 그쳐선 안 된다. 6월항쟁보다 덜 조직됐지만 ‘11·12 집회’의 명제는 분명했다. ‘국민이 주인이다.’ 그걸 제도적으로 풀어야 할 책임이 정치권에 있다. 야당 인사들이 정말 촛불 민심을 대한민국을 바꾸라는 ‘명예혁명’으로 여긴다면 당장 실익만 내세울 게 아니라 개헌 논의의 물꼬를 터줘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찬탄하는 11·12 집회가 ‘촛불 혁명’으로 기록될 것이다.
황정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