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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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피보다 진한 사이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일과를 기록한 내전일기(內殿日記). 1925년 7월1일부터 6개월간 순종의 일과가 11가지 항목으로 시간순으로 적혀 있다.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에 든 시간, 식사 시간과 식단, 낮잠과 운동 시간, 심지어 화장실에 간 시간까지 적혀 있다. 순종은 아침 7∼8시 일어나 11∼12시에 세수를 했다. 왜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했을까. 왕의 건강을 꼼꼼히 확인하기 위해서다.

2007년 7월21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딕 체니 부통령에게 잠시 대통령 권한을 넘겼다.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서 결장 내시경 검진을 받기 위해서였다. 부시 대통령이 전신 마취 상태에서 검사받던 2시간5분 동안 체니가 미국의 군통수권자였다. 1985년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용종 제거수술을 받을 때에도 부통령이던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이 권력을 잠시 이양받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 최고 지도자의 건강 상태는 안보와 직결되는 중요 정보다. 2008년 8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병설이 나돌았다. 우리 정보당국은 김 위원장의 뇌 MRI(자기공명단층촬영) 사진을 입수해 뇌졸중임을 확인했다. 같은 해 9월에는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김 위원장 건강 상태에 대해 “스스로 양치질할 수 있다”고 공개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김정일 주변 인사가 모두 교체되는 등 우리의 휴민트(인적 정보)망이 크게 무너졌다.

2013년 5월 첫 미국 방문에 나선 박근혜 대통령이 워싱턴 백악관 근처 한 호텔 행사에 참석했다. 청와대 경호실장의 테이블에 동석할 기회가 있었다. 대통령이 자리를 뜬 뒤 처리가 궁금해 끝까지 지켜봤다. 첩보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일까. 허무할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대통령이 만진 컵 등에서 지문을 지우고 혹시 남았을 머리카락 등을 수거하는 모습은 상상일 뿐이었다.

2013년 9월 청와대 의무실 간호장교가 박 대통령 혈액을 채취해 외부 병원으로 가져가 비선실세 최순실씨 이름으로 검사한 적 있다고 한다. 대통령 건강상태는 청와대에서 2급 비밀로 관리된다. 혹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봐 가족과 교류마저 끊고 외롭게 지냈다는 박 대통령. 최씨에게 자기 피를 맡겼으니 그는 피를 나눈 가족 이상이었던 셈이다.

박희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