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북한의 5차 핵실험 직후 군 당국이 대량응징보복(KMPR) 개념을 공개하며 유사시 북한 지도부 공격을 위한 특수전 전력 강화를 천명하고 훈련강도를 높이자 북한도 연평도 포격 6주기를 맞아 서해 북방한계선(NLL) 일대에서 긴장수위를 끌어올리고 있다. 당초 군 안팎에선 북한이 핵실험에 이어 장거리 미사일이나 무수단 중거리 탄도미사일 발사 등을 시도하리라는 전망이 많았으나 이같은 예상은 빗나갔다. 북한의 ‘정중동’ 움직임은 일반적인 예상을 깨고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됨에 따라 ‘전략적 인내’를 내세웠던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에 변화가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북한이 미국의 민간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탐색적 대화’에 나서고,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를 통해 트럼프의 대선 공약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도 이같은 기대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최순실 파문을 적극 보도하며 현 정부를 비난할 뿐 실질적인 군사행동은 자제하고 있으나 국내 정국의 변화에 따라 미군이 직접 개입하기 어려운 국지도발 등을 감행할 가능성은 남아있다.
◆ 자신들이 유리한 NLL 일대서 긴장 고조
북한은 9월 5차 핵실험 직후 함경북도 홍수 피해 복구에 주력하는 한편 인민군 수산사업소와 류경안과종합병원, 룡악산비누공장 등 인민생활과 밀접한 경제 분야를 현지 지도하는 김정은 위원장의 모습을 공개하며 ‘애민’ 행보를 부각시키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23일 연평도 포격도발 6주기를 앞두고 군부대를 방문하는 등 군사 행보에도 나섰다.
사격훈련을 실시하고 있는 북한군 4군단 포병대. 노동신문 |
조선중앙통신은 11일 김정은이 서해 백령도에서 가까운 마합도를 찾아 포사격 훈련을 지도했다고 밝혔다. 마합도는 황해남도 옹진반도 끝자락에 있는 섬으로 백령도에서 18㎞ 떨어져 있는 최전방 지역이다. 통신은 김정은이 “마합도방어대 1중대 2소대 3포를 이미 차지한 진지에서 기동시켜 정해준 목표를 타격할 데 대한 명령을 주시고 포실탄 사격훈련을 지도하시였다”고 전했다. 김정은은 이 자리에서 “싸움이 터지면 마합도 방어대 군인들이 한몫 단단히 해야 한다”며 강도 높은 전투준비태세를 주문했다.
마합도를 방문한 김정은은 북한 연평도 인근 최전방에 있는 갈리도 전초기지와 장재도방어대를 시찰했다. 조선중앙통신은 13일 갈리도 전초기지는 김정은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고 소개하면서 “적들이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한다면 즉시 멸적의 포화를 들씌울 수 있게 전변된(바뀐) 강위력한 화력타격기지”라고 강조했다. 김정은은 식당 등 시설을 둘러본 뒤 감시소에 올라 박정천 총참모부 포병국장에게서 갈리도 전초기지를 포함한 서남전선 포병부대의 연평도 대상물 타격임무 분담내용을 보고받은 뒤 ‘새로 재조직한 연평도화력타격계획전투문건’을 승인했다. 갈리도 전초기지를 방문한 김정은은 인근의 장재도방어대를 방문했다. 김정은은 지난 2012~2013년에 세 차례에 걸쳐 이곳을 찾았다.
김정은의 지시에 따라 해안을 향해 사격하는 마합도 방어대 해안포. 노동신문 |
김정은의 행보는 북한이 접경지역에서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는 황해남도 해안 지역에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켜 우리 측을 압박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수도권과 인접한 서북도서를 방어하는 서북도서방위사령부 예하에는 K-9 자주포와 구룡 다련장로켓, 스파이크 대전차미사일 등이 배치되어 있지만 수적인 측면에서 황해남도 해안을 담당하는 북한군 4군단의 해안포와 방사포에는 미치지 못한다. 잠수함과 지대공미사일 등도 NLL로 증원되는 우리 함정과 항공기를 위협할 수 있다. 군 관계자는 “과거에도 북한 수뇌부가 군부대를 방문한 이후 대남 도발을 감행한 전례가 있다”며 북한군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순진 합참의장과 이상훈 해병대사령관 등 군 수뇌부도 서북도서를 방문해 대응태세를 점검했다.
◆ 연합 및 특수전 훈련 강도 높이는 軍
북한의 5차 핵실험 직후 군 당국은 특수전 훈련에 공을 들이는 분위기다. 군은 북한 수뇌부를 제거하는 ‘참수작전’과 무관하다는 입장이지만 유사시 북한 후방에 침투해 핵심시설을 파괴하는 훈련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한미 군 당국은 특수부대 상호운용성 강화를 통한 연합 특수전능력 향상에 집중하고 있다.
군 당국은 지난달 27일 미 공군 353 특수작전단이 군산기지에서 공군 침투작전부대인 공정통제사(CCT) 요원들과 연합훈련을 했다고 밝혔다. 티크 나이프(Teak Knife)라고 명명된 이번 훈련에서 한미 공군 특수전 요원들은 유사시 항공기로 북한 내륙 깊숙이 침투하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실시했다. 훈련에는 미 공군 MC-130 수송기와 우리 공군 C-130 수송기가 투입돼 유사시 북한 핵미사일 시설을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육군 특수부대를 목표 지점에 정확히 투하하는 절차를 익혔다. 미 공군 353 특수작전단은 유사시 적지에 특수부대를 공수하고 지상의 특수부대에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8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본 오키나와 가데나(嘉手納) 기지에서 한반도 유사시 북한에 침투한다.
8일 한미 연합 공중강습훈련에 참가한 주한미군 CH-47 헬기. 육군 |
지난달 10∼21일 미국 알래스카에서 진행된 다국적 공군 연합훈련 ‘레드 플래그’에서는 공군 C-130 수송기로 미 육군 특수부대를 공수하는 훈련을 실시했다. 육군 특수부대가 미 공군 수송기로 강하훈련을 실시한 적은 있지만 미 육군 특수부대가 우리 공군 수송기로 강하훈련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8일 육군 30기계화보병사단은 호국훈련의 일환으로 남한강 대교 일대와 강원 홍천 서면 일대에서 한미 연합 공중강습작전을 펼쳤다. 훈련에는 미군 2항공여단 UH-60, CH-47 등 헬기 6대와 육군 항공작전사령부 UH-60 10대, AH-1S 4대, 강습대대 장병 250여명이 참가했다. 충주시 남한강 일대에서 공중강습 투입병력을 태운 한미 UH-60과 CH-47 헬기는 AH-1S의 엄호를 받아 적진에 침투했다.
지난 4~10일에는 한국, 미국, 영국 공군이 한반도 상공에서 ‘무적의 방패’(Invincible Shield) 연합훈련을 실시했다. 훈련에는 미 공군 F-16과 한국 공군 F-15K, KF-16 전투기, 영국 공군 타이푼 전투기가 참가했다. 영국 전투기가 국내에서 연합 훈련을 한 것은 6.25 전쟁 이후 처음이며 우리 공군이 미국 이외 국가의 전투기와 국내에서 훈련을 한 것도 처음이다. 영국은 한반도 유사시 유엔군사령부 소속으로 병력과 장비를 지원하는 국가다. 영국측은 이번 훈련이 북한 도발과 관계가 없다고 밝혔지만 미국과 영국 공군이 1991년 걸프전과 유고 내전, 이라크 및 아프간 공습, 이슬람국가(IS) 공습 등에서 함께 작전을 펼친 전례가 있는데다 북핵 시설 공습 가능성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다양한 추측을 낳았다.
현재 북한은 트럼프 차기 행정부에 대한 공식 반응을 자제한 채 외신과 관영언론을 통해 ‘카드’를 던지고 있다. 북미 관계 개선을 위해 협상 테이블에 조속히 앉으라는 신호다.
7일 한반도 상공에서 연합훈련을 실시하는 한국, 주한 미 공군, 영국 공군 전투기들. 공군 |
스위스 제네바 주재 북한대표부 서세평 대사는 18일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북미관계 정상화 논의의 전제조건인 ‘대북 적대시정책’ 포기 사례로 주한미군 철수와 평화협정 체결을 거론했다. 서 대사는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 “만남은 최고지도자(김정은)의 결정에 달려 있다”며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같은날 “트럼프 당선자의 공약은 상식적이고 타당한 주장”이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반면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0일 “미국의 새 행정부는 주체의 핵강국과 상대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5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수중 사출시험 성공 직후 기뻐하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노동신문 |
북한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정책을 탐지하고 북미 대화 가능성을 열기 위해 ‘탐색전’을 펼치고 있지만 트럼프 행정부 외교안보라인에 존 볼턴 전 유엔주재 대사와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 등 강경파가 주로 거론되고 있어 북한이 원하는 성과를 얻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트럼프 행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군사적 도발을 감행할 가능성이 우려되는 대목이다. 다만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처럼 도발의 대상을 미국에 둘 지, 미군의 직접 개입이 어려운 국지도발을 통해 동맹국인 한국을 압박할 지 여부는 대미 탐색전의 성과에 따라 달라질 전망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