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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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범죄 피의자가 대한민국을 이끌 수는 없다

국정 난맥상 장기화 안 돼
국회 새 총리 뽑고 탄핵해야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피의자로 입건됐다. 현직 대통령이 범죄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기는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헌법 84조에 규정된 현직 대통령의 불소추 특권에 따라 기소되진 않지만 사실상 ‘범죄자’로 특정된 것이다. 대한민국 국기와 민주주의 근간을 흔드는 엄중한 사안이다. 국정 혼란, 국민 불안을 최소화할 막중한 책임이 대통령과 정치권에 있다.

검찰 특별수사본부는 어제 최순실씨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을 기소하면서 박 대통령과 ‘공모’한 혐의를 적시했다. 최씨와 안 전 수석이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 자금을 기업들을 강압해 거두고 롯데 등 일부 대기업을 상대로 납품, 광고 수주 등 ‘갑질’을 해온 과정에 대통령이 직접 개입했다는 것이다. 더 기가 막힌 일은 국가 기밀인 청와대·정부 문건이 민간인인 최씨에 넘겨졌다는 사실이다. 정 전 비서관이 대통령 지시로 최씨 측에 보낸 문서는 검찰이 확인한 것만 180여건에 이른다. 여기에는 대통령 국무회의 발언, 해외순방 자료는 물론 외교 문건, 장·차관급 인선 자료 등이 망라돼 있었다. 이 정도면 대한민국에 두 명의 대통령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업화와 민주주의를 이룬 모범사례로 꼽혔던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검찰의 공소장대로라면 대통령은 최씨 국정농단 사건을 주도한 ‘주범’이나 다름없다. 대한민국 권력을 사유화한 최씨의 행태를 묵과한 수준이 아니다. 참담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대통령과 청와대는 검찰 수사 결과를 “상상과 추측을 거듭해서 지은 사상누각”으로 일축했다. 이번 주 검찰 대면조사에 응하겠다는 입장도 뒤집었다. 미르·K스포츠재단 모금은 정상적인 국정 수행의 일환이었으며 최씨, 안 전 수석과 ‘공모’는 없었다는 주장이다. 대통령 주변에서 대통령 뜻을 앞세워 이뤄진 일들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니 어처구니없다. ‘검찰 공화국’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검찰 수사를 국정에 적극 활용했던 박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수사를 “불공정하다”고 반론을 펴는 현실은 아이러니다.

박 대통령 입장은 분명하다. 특검 수사와 최씨 등에 대한 재판을 지켜보며 시간을 끌겠다는 것이다. 설사 최씨 등의 범죄 혐의가 입증돼도 대통령과 무관한 개인 비리로 선을 긋겠다는 전략이다. 정 전 비서관의 자료 유출에 “‘최순실의 의견을 들어보라’고 했을 뿐 연설문 자체를 ‘최순실에 직접 보내라’고 지시한 것은 아니다”는 대통령 변호인의 ‘면피성’ 설명은 압권이다.

대통령의 버티기로 극심한 국정 혼란이 우려된다. 그제 서울 도심을 비롯해 전국에서는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국민의 울림이 컸다. 거국적인 촛불 민심에도 꿈쩍 않는 대통령을 향한 분노는 컸지만 그 분출은 평화스러웠고 질서정연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피의자’ 신세가 됐는데도 “국정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다”고 선언해 정국은 일촉즉발의 상황이 됐다.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민심이 어떻게 요동칠지 가늠키 어렵다.

대한민국이 파국으로 치닫기 전 정치권이 수습에 나서는 수밖에 없다. 국정 공백을 최소화할 새 총리를 뽑고 헌법이 정한 대로 탄핵 절차를 밟아야 한다. 헌법은 ‘대통령이 그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에 위배한 때’ 탄핵 절차에 돌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최씨 등의 공소장에 대통령 ‘공모’가 적시됐으니 국회가 탄핵 발의를 하지 않으면 직무유기다. 본지는 그동안 하야·탄핵과 같은 헌정사의 불행한 일이 없도록 대통령의 퇴진 결단을 요구했으나, 검찰의 수사 결과와 이에 대한 대통령의 반응은 정치적 해법을 폐기처분했다. 이제 헌법정신을 스스로 훼손한 최고 지도자에 헌법의 이름으로 준엄하게 책임을 묻는 길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