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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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타워] ‘왕차관 그림자’ 지울 수 있을까

체육계 김종 사람들 건재… 비정상의 정상화 갈 길 멀어
2008년 8월 베이징올림픽 남자 자유형 400m에서 금빛물살을 갈라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마린보이’ 박태환(27)은 금지약물 검출로 국제수영연맹(FINA)으로부터 18개월 출전정지를 당한 뒤 지난 4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리우행 티켓을 당당히 따냈지만 대한체육회의 3년간 국가대표 선발 제한조치라는 ‘이중처벌’에 걸려 곤욕을 치렀다. 체육회의 끊임없는 방해공작에 부딪힌 박태환은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와 국내 법원에 소송을 내 올림픽 개막 한 달을 앞두고 간신히 올림픽 대표자격을 얻었다. 체육회의 방해공작에는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던 ‘체육계의 대통령’으로 군림한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아니나 다를까. 비선 실세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핵심인물인 김 전 차관은 이중처벌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각계의 도움을 요청하던 박태환을 지난 5월 만나 리우올림픽 출전을 무산시키기 위해 협박과 회유를 했다는 녹취록이 공개됐다. 아시아 수영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느라 일본에 머물던 박태환은 엊그제 “너무 높으신 분이라서 무서웠다”고까지 했다. 모든 운동선수들의 꿈과 희망인 올림픽 출전을 꺾으려던 김 전 차관의 행동은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다. 스포츠 ‘4대 악’을 소탕하겠다는 그는 조직폭력배 같아 경악스러울 정도다.


박병헌 선임기자
뜬금없이 스포츠 4대 악 척결, ‘비정상의 정상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무차별적으로 칼질을 했던 장본인이 김 전 차관이었다. 역대 최장수 문체부 2차관으로 재임한 그의 ‘완장’ 위세에 눌려 스포츠계는 아무 말도 못하고 신음했다. 비선 실세로 국정농단을 한 최순실을 앞세워 호가호위한 김 전 차관이 찬 ‘완장’이 유별나게 번쩍거린 탓이다.

김 전 차관이 2013년 10월 부임 이후 “스포츠계에 만연한 범죄를 소탕하겠다”는 식으로 공포 분위기를 다잡은 것은 결국 최순실·정유라 모녀의 편의를 봐주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최씨 일당의 수익사업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던 조양호 한진그룹회장의 평창 동계올림픽조직위원장 사퇴, 최씨의 조카 장시호가 주도한 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대한 국고 지원 등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체육계에서 벌어진 수많은 수수께끼가 비로소 하나둘씩 밝혀지고 있다.

과거 대한체육회를 거치던 방식에서 문체부가 경기단체에 직접 예산을 지원하면서 줄 세우기는 일반화했다. 스포츠 발전에 크게 기여한 한국체육과학연구원은 의미도 불명확한 한국스포츠개발원으로 개칭됐고, 은퇴 선수 등을 위한 실질적 교육기관 구실을 했던 체육인재육성재단은 케이스포츠재단과 사업영역이 겹치자 지난해 말 독립법인에서 국민체육진흥공단의 일개 부서로 축소됐다. 김 전 차관이 총지휘한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의 지나치게 강압적인 통합은 후유증으로 지금도 곳곳에서 불협화음이 나오고 있다. 국정농단 세력들은 국가 권력을 자신들의 치부의 수단으로 악용했다. 김 전 차관의 수족역할을 했던 스포츠공정위원회는 기능이 정지됐지만 현재 그늘진 유산이 체육계 도처에 널려 있다. 그렇지만 이를 지우려는 당국의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김 전 차관의 지휘 아래 칼춤을 춘 고위 공직자는 여전히 공직에 붙어 있다. 조직을 위해 충성했던 공직자는 짤려 나간 지 오래이지만 ‘나쁜 사람’에 충성한 사람은 여전하다. 잘못된 제도와 유산을 털어내는 ‘비정상의 정상화’가 요원해 보여 안타깝다.

박병헌 선임기자